제목 : 예수 성심(Sacro cuore di Gesu: 1767)
작가 : 폼페오 바토니 (Pompeo Batoni : 1708- 1787)
크기 : 320 X 481 cm
소재지 : 이태리 로마 예수 대성당
성미술의 관점을 떠나서라도 크리스천들이 가장 궁금해 한 것은 자신들이 믿는 예수님의 모습이었다. 예수님의 직제자들이야 생전에 만남을 통해 기억할 수 있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제자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 조차 예수님의 모습은 기억에서 희미해지면서 그리움과 궁금증은 더 증폭되었다.
이런 정서에서 초세기에는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많이 그려지다가 10세기를 넘으면서 신자들은 자연스럽게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겪으신 인간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면서 지상 삶을 사셨던 인간 예수에 대한 관심을 키우게 되었다.
그러나 그분의 용모에 대한 관심 보다는 그분 삶의 모습 즉 인간에의 사랑을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고통을 통해 표현하신 영적인 존재로서의 모습이 더 강조되었다.
이처럼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지상 예수의 삶을 그리면서 예수님의 얼굴은 그 시대에 따라 여러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되었다.
시토회 창설자인 끌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성 프란치스코를 거치면서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지극한 공경심, 특히 인간에의 사랑 때문에 그토록 어려운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리면서 인간에 대한 극단의 사랑을 지닌 하느님의 아들이신 인간 예수의 모습에 집중되었다.
중세에 접어들면서 신비신학의 영역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함으로서 그분의 고통에 동참하고자 하는 수덕적인 경향을 띄기 시작했기에 이런 경향은 신자들의 신심 생활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이 작품은 인간 예수에 대핸 신앙이 심화되면서 예수님의 외모가 아닌 그분의 참모습인 영적인 면모에 눈뜨면서 제작된 것이다.
작가는 이태리 중부 루카(Lucca)에서 금속 세공업자의 자녀로 출생해서 로마에 가서 공부한 후 초상화 제작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 유럽의 여러 명사들의 초상화를 많이 제작하면서 대단한 인기를 얻게 된다.
1728년 로마에 가서 라파엘로의 작품과 바티칸궁전의 고대 조각 등을 연구하고, 고전주의의 작풍을 자연에 접목한 초상화가로서도 호평을 받아 교황 ·황제 ·귀부인 등의 초상화를 많이 남겼다.
이 작품은 로마에 있는 예수회 본부 성당에 있는 예수성심 경당에 모셔져 있다. 이 작품은 근대 예수 성심 공경에 극적인 전환기를 마련했던 프랑스 성모 방문회 수녀였던 성녀 말가리라 알라콕 (Saint Margaret Mary AlacoquE : 1647- 1690)수녀의 신앙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성녀는 1673년 12월 27일 발현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며 이 발현 체험은 그의 전 생애에 이어지게 된다.
이때 주님께서는 매 첫 목요일 한 시간의 성시간을 가지면서 당신의 제세마니의 고통에 동참해달라는 부탁을 하셨는데, 여기에서 첫 목요일 성체조배 신심이 시작되었다.
당시 성녀의 영적 지도신부가 예수회 사제였기에, 이런 인연에 의해 예수 성심 공경은 예수회의 이름에 걸맞는 신심 운동이 되었으며, 이 작품은 오래 동안 이런 신심운동을 벌리는 예수회의 대표 신심 운동이 되었다.
이런 노력에 의해 예수성심 대축일은 보통 성신강릴 대축일 후 19일이 지난 금요일에 지내게 되었으며, 1856년부터 예수 성심 공경의 신심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받으신 고통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흐르게 되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호감을 줄 수 있는 약간 여성스러운 얼굴에 잘 손질된 머리가 어깨를 덮고 있어 더욱 평온하게 보인다. 과거 프란치스칸들이 강조했던 십자가에서 극도의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과 달리 보는 사람의 눈을 평안하고 즐겁게 하면서 예수님께로 마음을 향할 수 있게 배려되었다.
또한 예수님이 입은 옷 역시 너무도 우리에게 익은 붉은 색의 옷에 푸른 색 망토를 걸치고 계신다.
붉은 색은 예수님이 체포되신 후 재판을 받으실 때 입은 옥 색깔이 그분 삶의 색깔이다.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 우리와 꼭 같은 인간으로 오셔서 갖은 고통과 수난을 겪으시고 너무도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겪으신 지상 삶을 사셨던 인간 예수의 상징이다. 겉에 걸친 푸른 색깔의 망토는 성부와 같으신 하느님의 성자로서 그분 신성의 상징이다.
예수님은 왼손에 심장을 들고 계시는 데, 그 심장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으며, 그 위에 십자가가 있다. 또한 그 심장의 주위엔 당신이 골고타를 오르실 때 쓰셨던 가시관이 둘러 있다.
이것은 말가리다 알라콕 성녀가 발현에서 본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모습이 줄 수 있는 충격을 최소한으로 축소시키면서 십자가의 사랑과 그 주위를 가시로 아름답게 처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고통에 대한 낭만적인 정감에 빠지게 만들었다.
작가는 전체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상반되는 것의 조화를 통해 예수님을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다. 곱상스런 표정의 고통과 거리가 먼 그런 우아한 모습의 예수님이 들고 있는 심장이 바로 우리 인간에 대한 사람을 극도의 고통을 통해 표현하신 예수님의 삶을 상징하고 있다.
크리스천들은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신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나 좀 부드러운 모습의 예수님을 보기를 원하는데, 이 작품은 이런 신자들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었다.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지상 삶의 모습은 심장으로 표현하면서 영적인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제한하고 일상에서는 너무 멋지고 성공한 인간의 모델, 어디 내어놓아도 편안하게 보이는 그런 예수님을 원하다 보니 이 작품은 은 대단한 감동을 느끼게 만들었다.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 부담스러운 것 보다 부담스러운 것을 덜어줄 수 있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더 어필하게 되는 것은 특별한 신앙 체험이 있는 신자들을 제외하곤 일반적인 정서이기에 이 작품은 오랫동안 가톨릭 신자들의 가정에 걸릴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예수의 모습이 되었다.
오늘도 많은 신자들은 주일 성당에 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약간 현세와 타협된 이야기를 듣기를 더 좋아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전하는 것에 대해선 부담을 느끼며 요즘엔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신자들도 늘어가고 있다.
한마디로 세월호의 아픔이나 노동의 부조리를 이야기 하면 몹시 힘들어 하는 신자들을 보면 이 작품이 많은 신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잘 그린 것으로 인정받은 것 같은 정서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런저런 이유에 의해 이 작품은 많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대단한 사랑을 받았으며 예수성심 기도문에 나오는 모든 것을 다 수용하면서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수준에 부담이 없는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예수 성심성월에 바치는 기도중 “마음이 영선하시고 겸손하신 예수님 우리 마음을 당신 마음과 같게 하소서” 라는 정서에 어울리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는 신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성서 구절을 상기시키는 것 같기에 오랫동안 신자들에게 사랑받던 성화였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