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와 복음은 ‘영원한 구원’, ‘영원한 생명’을 얘기합니다.
그러니 오늘 사순 제5주일은 ‘영원한 구원/생명을 얻는 길’이 주제일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의 길은 요한복음에서 아주 선명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에 예수님이라는 길을 따라가면
진리의 길을 가고 생명의 길을 가게 되기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저 김찬선을 따라오시면 안 됩니다.
그러나 제가 주님을 프란치스코나 성인들처럼 잘 따르는 사람이면
저를 따르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 되기에 저를 따라도 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저를 따라오시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주님을 잘 따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 봐야 합니다.
어떤 것이 주님을 잘 따르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떠나야 길입니다.
떠나지 않는 길이란 없습니다.
문제는 길 떠나는 인생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황천길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자기 목숨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에 가기보다 이집트에서 사는 것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십계명 가운데서 제4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 지켜야 한다고 하신 다음,
모든 걸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시자 따르지 않습니다.
그가 생각한 영원한 생명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주님을 따라야 하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있던 곳을 떠나야 하며,
죽음이라는 강도 건너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홍해가 있었습니다.
홍해는 죽음의 강이기도 하고 생명의 강이기도 합니다.
이집트의 목숨은 잃고 가나안의 목숨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것이 싫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것이 싫습니다.
자기 부정이기 때문인데 그러나 자기 목숨을 미워함은
작은 자기는 부정하고 큰 자기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소아(小我)는 죽고 진아(眞我)로 살기 위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