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평화와 선.
아침 미사 끝나자 마자 성령의 바람이 불어- 전혀 계획없이 추진된 일이었으니까- 우선 새남터 성당으로 향했다. 거긴 내 학창 시절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서린 곳.
고교 1학년 때였으니까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은 한옥식 대성당이 세워져 있지만, 당시엔 성당이나 특별히 순교지라고 할 만한 아무런 티도 발견할 수 없는, 한강변 모래사장에 인접해 있었고 주변엔 가난한 동네가 자리한 그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초라한 공터의 모습에 불과했었다.
내가 새남터 순교지를 갔던 것은 아주 특별한 인연에서였다.
무슨 행사였는지 모르지만,그 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같은 반 신자 친구인 '김선덕'이란 녀석과 함께 새남터를 찾아갔는데, 그곳이 아니고 절두산 성지에서 행사가 열린다는 거였다. 그래서 우리 둘은 황당했지만, 이미 내친김에 절두산으로 가보기로 마음 먹었다. 교통 편이 참으로 불편한 그 시절이기도 했지만 우리 둘은 순례의 마음으로 룰루랄라 강변을 따라 멀리 보이는 당인리 발전소를 따라 하염없이 걷기 시작하였다.
내 인생에 있어서 그것은 "첫 순례"였다. 그런데 잡힐듯 잡힐듯 가물가물한 당인리 발전소가 왜 그리 멀기도 한지...절두산 성지는 바로 당인리 근처란 말을 들었기에 무작정 그 방향을 향해 걸었던 것이다. 그땐 또 무슨 바람이었는지, 고1 신학년부터 무거운 워커를 신고 학교에 다녔으니, 행군하는 군인들 모양으로 좀 무거었겠는가?
어쨌던 예수님을 생각하는 작은 희생심으로나마 둘은 순례자의 마음으로 흔쾌히 걸을 수 있었다.
무거운 다리를 의식하며 절두산 성지에 다다르니, 웬걸 너무 늦은 시각이라 이미 행사가 다 파장한 뒤였고, 둘은 기왕에 간거니 순교자들의 향취를 맡으려 절두산 바위 위엘 올라가 보기도 하고 그 아래 모래벌로 내려가 신기하듯 절벽을 올려다 보기도 하였으니- 그 옛날 순교자들의 목이 잘려 뚝뚝 떨어지는 선혈과 함께 까마득한 절두산 절벽 아래 모래벌로 내버려졌던 모습들만 섬찍하니 상기되었다. 역시 절두산에도 당시엔 성당이고 뭐고 성지라 할 만한 제대로의 모양이 전혀 갖추어 지지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유유자적 흘러가는 세월처럼 한강 만이 무심히 흐르고 있었다.
새남터 성당에서 십자가의 길을 마치고 밖을 나서니 봄비 치고는 제법 많은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 가물은 터에 그야말로 은총의 단비로고! 까프스처럼 웃옷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 쓰니 그런대로 우산처럼 임시변통으로 머리만은 비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용산역 가까이에 이르러 참으로 희한한 동네를 지나쳤다. 쇼우윈도처럼 생겨 칸칸이 줄을 이은 텅 빈 집들이 있었고(아마도 아침 이른 시각이라 그랬나보다) 마지막 칸엔 좌우로 젊은 세 여자들이 거의 반나체로 요염히 앉아 있으면서 지나치는 나를 보고는 반색을 하며 "쉬어 가세요!"하며 쌩끗 웃는다. 아차 스치는 느낌- 그러면 이런데가 바로 홍등가...!!!???
그런 거리를 지나치면서 예전 예루살렘 성지에 갔었을 때의 기억과 함께 '사막의 성녀 마리아'의 일화가 떠올랐다. 빼어난 미모의 성녀는 회개하기 이전 알렉산드리아란 도시에서 뭇 사내들에게 성을 팔며 생활했단다. 그러던 어느날 순례단에 끼어 예수님이 돌아가신 자리인 "거룩한 무덤 성당"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례단을 만나 자신도 순례 한번 가볼까 하는 단순한 맘이 동하여 순례단에 합류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무덤 성당에 이르러 계단을 오르려 하니, 다른 순례자들은 다 들어갔어도 성녀 만은 옴짝달싹 발이 떨어지지 않는 바람에 죄많은 자신이 너무도 서글펐고 그만 눈물을 펑펑 쏟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후에야 언제 그랬는 듯이 엿같이 붙었던 발이 스르르 떨어져 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단다. 그 기적의 체험으로 이후 다시는 죄에 물들지 않았고 사막으로 숨어들어가 오랜 평생 철저한 회개의 삶을 살았다.
그렇다. 홍등가를 지나치면서 불연듯 스치는 성(聖)과 속(俗)에 관한 화두와 함께- 우리 모두 세속화의 위험중에 내던져졌지만 '거룩함'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 아닌가. 어떤 연유에서건 지금은 저런 생활을 하고있는 측은한 여성들이지만, 각계각층에 오히려 저들보다 못한 속물 인간들이 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가? 홍등가 여인들이 성녀 마리아처럼 새롭게 삶을 태어났으면 하는 간절함으로 화살 기도를 드렸다.
얼마 후 지하철에서 내려 이왕지사 가는 길에 절두산 성당에 아직도 계시리라 생각한 '김수창' 신부님께 드리려고 인절미랑 감자떡을 사들었다.(그런데 신부님은 이미 오래 전에 여주로 떠나셨단다!!!)
성당엘 들어서니, 이미 어디에서 왔는지 피정하는 분들의 그룹으로 가득 차 있었고 성체를 배령하는 시간이었다. 나름대로 십자가의 길과 로자리오를 바치고, 그 아래 기념관을 둘러 보았다. 한국 초기 순교자들- 이승훈 베드로하며 이벽 성조를 위시한 강학회 이야기, 수선탁덕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굴고 짧은 생애, 황사영의 깨알같은 백서, 정약용 형제들의 순교사화, 뛰어난 여성 신앙의 선구자 강골롬바, 동정 부부 유요한과 누갈다의 수도자 같은 삶 이야기...기묘사화, 을사사화를 통해 이 땅에 피어난 순결의 꽃들, 어쩌면 동백꽃처럼 뚝뚝 떨어졌을 끝없이 이어진 한국 초기 성인 성녀들의 순교사화와 함께 그분들의 생생한 유해 유물 유품들이 소장되어 있어, 정말 그 시절의 순교 참상이 어떠했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겠다.
특히 역관이었던 아버지의 순교를 뒤따라 자청해서 13세의 어린 나이임에도 용맹스럽게도 스스로 시퍼런 칼날에 목을 내어맡긴 순교 성인 '유대철'의 성화 앞에선 그토록 하늘 나라를 그리워한 열정 앞에 눈물이 났다. 성스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랄까, 연약한 어린 아이였음에도, 피 한방울만 나와도 으아악 비명을 질렀을 요즘 아이들(아이들 뿐이랴. 어른들도 감내하기 어려운 극한 고통 상항에)과는 달리... 오로지 하느님께로의 일념으로 무서움도 두려움도 능히 참아 낼 수 있었던 건...모든 것을 은총의 감로수로 받아 마셨으니...참으로 뉘도 흉내낼 수 없는 장렬한 어린 성인이로고!
그렇다! 그렇듯 거룩하고 장한 순교의 피를 면면히 이어 받은 우리들은, 매일 매 순간마다 순교 열정의 삶을 깊이 깊이 되새겨 우일무이한 일회적 생애를 후회없이 보내야 하리!
아침 미사 끝나자 마자 성령의 바람이 불어- 전혀 계획없이 추진된 일이었으니까- 우선 새남터 성당으로 향했다. 거긴 내 학창 시절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서린 곳.
고교 1학년 때였으니까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은 한옥식 대성당이 세워져 있지만, 당시엔 성당이나 특별히 순교지라고 할 만한 아무런 티도 발견할 수 없는, 한강변 모래사장에 인접해 있었고 주변엔 가난한 동네가 자리한 그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초라한 공터의 모습에 불과했었다.
내가 새남터 순교지를 갔던 것은 아주 특별한 인연에서였다.
무슨 행사였는지 모르지만,그 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같은 반 신자 친구인 '김선덕'이란 녀석과 함께 새남터를 찾아갔는데, 그곳이 아니고 절두산 성지에서 행사가 열린다는 거였다. 그래서 우리 둘은 황당했지만, 이미 내친김에 절두산으로 가보기로 마음 먹었다. 교통 편이 참으로 불편한 그 시절이기도 했지만 우리 둘은 순례의 마음으로 룰루랄라 강변을 따라 멀리 보이는 당인리 발전소를 따라 하염없이 걷기 시작하였다.
내 인생에 있어서 그것은 "첫 순례"였다. 그런데 잡힐듯 잡힐듯 가물가물한 당인리 발전소가 왜 그리 멀기도 한지...절두산 성지는 바로 당인리 근처란 말을 들었기에 무작정 그 방향을 향해 걸었던 것이다. 그땐 또 무슨 바람이었는지, 고1 신학년부터 무거운 워커를 신고 학교에 다녔으니, 행군하는 군인들 모양으로 좀 무거었겠는가?
어쨌던 예수님을 생각하는 작은 희생심으로나마 둘은 순례자의 마음으로 흔쾌히 걸을 수 있었다.
무거운 다리를 의식하며 절두산 성지에 다다르니, 웬걸 너무 늦은 시각이라 이미 행사가 다 파장한 뒤였고, 둘은 기왕에 간거니 순교자들의 향취를 맡으려 절두산 바위 위엘 올라가 보기도 하고 그 아래 모래벌로 내려가 신기하듯 절벽을 올려다 보기도 하였으니- 그 옛날 순교자들의 목이 잘려 뚝뚝 떨어지는 선혈과 함께 까마득한 절두산 절벽 아래 모래벌로 내버려졌던 모습들만 섬찍하니 상기되었다. 역시 절두산에도 당시엔 성당이고 뭐고 성지라 할 만한 제대로의 모양이 전혀 갖추어 지지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유유자적 흘러가는 세월처럼 한강 만이 무심히 흐르고 있었다.
새남터 성당에서 십자가의 길을 마치고 밖을 나서니 봄비 치고는 제법 많은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 가물은 터에 그야말로 은총의 단비로고! 까프스처럼 웃옷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 쓰니 그런대로 우산처럼 임시변통으로 머리만은 비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용산역 가까이에 이르러 참으로 희한한 동네를 지나쳤다. 쇼우윈도처럼 생겨 칸칸이 줄을 이은 텅 빈 집들이 있었고(아마도 아침 이른 시각이라 그랬나보다) 마지막 칸엔 좌우로 젊은 세 여자들이 거의 반나체로 요염히 앉아 있으면서 지나치는 나를 보고는 반색을 하며 "쉬어 가세요!"하며 쌩끗 웃는다. 아차 스치는 느낌- 그러면 이런데가 바로 홍등가...!!!???
그런 거리를 지나치면서 예전 예루살렘 성지에 갔었을 때의 기억과 함께 '사막의 성녀 마리아'의 일화가 떠올랐다. 빼어난 미모의 성녀는 회개하기 이전 알렉산드리아란 도시에서 뭇 사내들에게 성을 팔며 생활했단다. 그러던 어느날 순례단에 끼어 예수님이 돌아가신 자리인 "거룩한 무덤 성당"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례단을 만나 자신도 순례 한번 가볼까 하는 단순한 맘이 동하여 순례단에 합류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무덤 성당에 이르러 계단을 오르려 하니, 다른 순례자들은 다 들어갔어도 성녀 만은 옴짝달싹 발이 떨어지지 않는 바람에 죄많은 자신이 너무도 서글펐고 그만 눈물을 펑펑 쏟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후에야 언제 그랬는 듯이 엿같이 붙었던 발이 스르르 떨어져 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단다. 그 기적의 체험으로 이후 다시는 죄에 물들지 않았고 사막으로 숨어들어가 오랜 평생 철저한 회개의 삶을 살았다.
그렇다. 홍등가를 지나치면서 불연듯 스치는 성(聖)과 속(俗)에 관한 화두와 함께- 우리 모두 세속화의 위험중에 내던져졌지만 '거룩함'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 아닌가. 어떤 연유에서건 지금은 저런 생활을 하고있는 측은한 여성들이지만, 각계각층에 오히려 저들보다 못한 속물 인간들이 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가? 홍등가 여인들이 성녀 마리아처럼 새롭게 삶을 태어났으면 하는 간절함으로 화살 기도를 드렸다.
얼마 후 지하철에서 내려 이왕지사 가는 길에 절두산 성당에 아직도 계시리라 생각한 '김수창' 신부님께 드리려고 인절미랑 감자떡을 사들었다.(그런데 신부님은 이미 오래 전에 여주로 떠나셨단다!!!)
성당엘 들어서니, 이미 어디에서 왔는지 피정하는 분들의 그룹으로 가득 차 있었고 성체를 배령하는 시간이었다. 나름대로 십자가의 길과 로자리오를 바치고, 그 아래 기념관을 둘러 보았다. 한국 초기 순교자들- 이승훈 베드로하며 이벽 성조를 위시한 강학회 이야기, 수선탁덕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굴고 짧은 생애, 황사영의 깨알같은 백서, 정약용 형제들의 순교사화, 뛰어난 여성 신앙의 선구자 강골롬바, 동정 부부 유요한과 누갈다의 수도자 같은 삶 이야기...기묘사화, 을사사화를 통해 이 땅에 피어난 순결의 꽃들, 어쩌면 동백꽃처럼 뚝뚝 떨어졌을 끝없이 이어진 한국 초기 성인 성녀들의 순교사화와 함께 그분들의 생생한 유해 유물 유품들이 소장되어 있어, 정말 그 시절의 순교 참상이 어떠했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겠다.
특히 역관이었던 아버지의 순교를 뒤따라 자청해서 13세의 어린 나이임에도 용맹스럽게도 스스로 시퍼런 칼날에 목을 내어맡긴 순교 성인 '유대철'의 성화 앞에선 그토록 하늘 나라를 그리워한 열정 앞에 눈물이 났다. 성스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랄까, 연약한 어린 아이였음에도, 피 한방울만 나와도 으아악 비명을 질렀을 요즘 아이들(아이들 뿐이랴. 어른들도 감내하기 어려운 극한 고통 상항에)과는 달리... 오로지 하느님께로의 일념으로 무서움도 두려움도 능히 참아 낼 수 있었던 건...모든 것을 은총의 감로수로 받아 마셨으니...참으로 뉘도 흉내낼 수 없는 장렬한 어린 성인이로고!
그렇다! 그렇듯 거룩하고 장한 순교의 피를 면면히 이어 받은 우리들은, 매일 매 순간마다 순교 열정의 삶을 깊이 깊이 되새겨 우일무이한 일회적 생애를 후회없이 보내야 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