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님께서는 주인과 소작인의 비유를 드시면서
당신은 주인이고 우리는 소작인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솔직히 서운하고,
그리고 우리는 도대체 하느님께 어떤 존재인지 생각게도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입니까, 소작인입니까?
우리를 당신 아들이라고 하시고는 왜 소작인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느님은 우리를 아들로 여기는데
우리가 자신을 스스로 소작인이나 종으로 만든 것인지도 모릅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하시고
그러니 같이 살면서 공동소유하자고 하시는데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며 자기 몫을 떼어달라고 하고
거덜 났을 때에는 품꾼이라도 되게 해달라고 하지요.
프란치스코도 얘기하듯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것은 다 우리 것이라고 하시고
정말 모든 것을 다 주셨는데도 우리 인간은 줘야지만 받는 것은 싫고
굳이 내 것이 따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관계까지 아버지와 아들이 아니라 남남의 관계로 만들어버립니다.
사실 하느님의 것을 내 것으로 소유하려는
탐욕과 강탈의 죄도 우리의 큰 죄이지만
관계를 부자의 관계에서 남남의 관계로 만드는 배반의 죄가 더 큰 죄입니다.
우리 부모자식 간에도 종종 그런 일이 벌어지잖아요?
부모는 자식을 한 번도 남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자기의 재산도 다 자식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식이 자기의 가정을 꾸리는 순간,
다시 말해서 자기가 일가一家를 이루는 순간
차츰 자기 식구와 자기의 재산을 챙기면서 점차
부모의 재산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 하고 그래서 남남이 되어갑니다.
여기서 저는 요한복음의 17장의 대사제의 기도를 떠올립니다.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이런 확신이 필요하고
이런 확고한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것이 다 내 것이고 내 것이 아버지 것이라는 확신과
서로를 떠나지 않고 서로 안에 서로가 있는 그런 관계 말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것이 다 내 것이라는 확신은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으로 만들려는 그런 도둑질, 강탈이 아닌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확고한 사랑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순절에 소작인이었던 우리를
다시 아들로 되돌립시다.
소작인이 되지 말고 아들과 딸들이 됩시다.
하느님은 우리를 아들과 딸이라고 하시는데
우리 스스로 우리를 소작인이라고 하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