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배고픔과 목마름 때문에 우물가에 앉으십니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길을 걷느라 지치셨다고 표현하고 있으며,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고을에 가 있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물을 길으러 나온 여인에게
물을 청하십니다.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이야기를 한참 읽다보면
예수님께서 정말 배고프시고 목마르신 것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청했던 여인이
오히려 당신에게 물을 청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대목이 나오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사온 먹을 것에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도리어 자신에게는 제자들이 모르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배고픔고 목마름은
육체적으로만 해석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먹을 것을 사 가지고 온 제자들이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라고 묻지 않았다고
복음사가는 이야기 합니다.
즉 제자들의 머릿속에는 이러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찾고 계셨을까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목마름은 과연 무엇에 대한 목마름인가요?
십자가 곁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 목마름을 육체적 목마름으로 해석해서
예수님께 신 포도주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찾고자 하셨던 것은
여인의 구원이었고,
여인이 다시 아버지께 돌아와
아버지께 진실한 예배를 드리기를
그렇게 아버지와 다시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이었으며,
여인은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인정하면서
구원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갑니다.
남편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지만,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싫어서
정오에 물을 길으러 나온 여인이
이제는 고을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숨어 지내던 그녀는,
자신을 숨겨왔던 그녀는,
빛을 만나고 난 후,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빛으로 나옵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고,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모르는
양식을 드시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목마름 역시
여인의 구원에 대한 목마름이었고,
십자가 위에서의 목마름 역시
인류의 구원에 대한 목마름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이라는 다름이 주는
거부감, 분열을 허물고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일치로 나아가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죄로 인해서,
우리 안에 있는 어둠으로 인해서,
빛을 거부하고,
빛에서 멀어지려는,
그렇게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하느님과 등지려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먼저 손을 내밀어 주십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빛 앞에 섰을 때 보게 되는 우리의 어둠 때문에,
빛으로 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의 약함 때문에,
나의 부족함 때문에,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죄와 잘못 때문에,
우리는 점점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우리의 나약함을 알고 계시기에,
우리의 죄와 잘못을 따져 묻지 않으십니다.
빛으로 나오십시오.
나의 죄와 잘못,
나의 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해도 괜찮습니다.
물론 그 인정이 힘들고,
때로는 고통을 가지고 오지만,
그 인정은 또한 우리에게 참된 해방을 가지고 오고,
참된 자유를 가지고 올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목말라 하시고,
그것을 배고파하십니다.
우리 각자가 하느님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과 함게 기뻐 뛰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마음속에 조용히 와서 앉으시며,
우리에게 물을 청하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한 주간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