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만 그렇게 느끼거나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욕구와 갈구가 다르게 저에게 다가오고,
욕망과 갈망이 저에게는 다른 의미로 이해됩니다.
욕구와 욕망이 많은 경우 안 좋은 뜻,
다시 말해서 육체적이고 쾌락적인 뜻으로 쓰이는데 비해
갈구와 갈망은 영적인 것을 구하고 바라는 것으로 쓰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영적인 갈구나 갈망은 어색하지 않지만
영적인 욕구나 욕망은 흔히 쓰이지 않기에 어딘지 어색하지 않습니까?
아무튼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 인간의 갈증에 대해서 얘기하고
그 갈증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에 대해서 답을 줍니다.
저는 여기서 자문을 합니다.
나는 갈증 목마름을 느끼고는 있는지?
있다면 그 목마름은 어떤 목마름인지?
저는 사춘기와 20대까지의 방황을 끝낸 후에는
내내 행복했고, 지금은 더더욱 행복합니다.
저는 제 나이의 다른 사람들보다 건강하고,
무엇보다도 사랑을 참 많이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행복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 미안합니다.
나만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지금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럽고 불행해 하는데.
그런데 다른 한 편 나의 행복이 참 행복인지,
이 행복 때문에 영적인 갈증이 크지 않은 것은 아닌지 성찰케 됩니다.
문득 군대 생활 할 때가 생각이 납니다.
노상 군가만 부르고 꽥꽥 소리 지르는 분위가가 너무도 삭막하고 처량할 때
국군의 방송을 시작할 때면 으레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이 나왔지요.
이때처럼 클래식 음악이 감미로웠던 적이 그 전도 그 후도 없었지요.
너무도 메마른 그때의 감성이 그렇게 음악의 갈증을 느끼게 했던 거지요.
음악보다 더 갈증을 느낀 것은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성당이 그리웠고 영성체가 너무너무 그리웠습니다.
그런데 성당이 없으니 법당에도 나가고 교회에도 가 그 갈증을 덜었습니다.
그때와 비교할 때 저는 저의 지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좀 헷갈립니다.
그때만큼 영적인 갈증이 부족한 지금을 걱정스러워해야 할지,
갈증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충족된 삶을 살고 있음을 그저 감사하면 되는지.
그야 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이 세상의 행복이
영적인 갈증을 못 느끼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저를 경계하면 되겠지요.
그럼에도 이 얘기를 한 이유는 저와 달리 영적 갈증을 느끼는 분들에게,
다시 말해서 제가 미안하게 생각하는 분들에게 격려를 드리기 위해섭니다.
지금 여러분이 너무 고통스럽고 불행하다고 느끼신다면,
지금 아무 즐거움도 기쁨도 없고 무미건조하시다면,
지금 내 곁에 아무도 없고 그래서 너무도 외로우시다면
오늘 사마리아의 여인처럼 영적인 갈증을 호소하십시오.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왜냐하면 영적우물은 깊은데 두레박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사마리아 여인처럼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선생님,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에서 그 생수를 마련하시렵니까?”
우리는 갈증만 느끼면 되고 갈망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여인처럼 천진난만하게 청하면 됩니다.
주님은 청하기도 전에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시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