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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nus Dei (아뉴스 데이)

by 이종한요한 posted Apr 1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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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nus Dei (아뉴스 데이)

 

크리스챤 신앙의 핵심은 부활신앙이며 부활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전제로 하기에, 크리스챤들은 성주간 전례를 통해 부활 신앙의 핵심에 접근하며 심화시키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고픈 제자들의 열정에 의해 당시 세계의 수도인 로마 제국에까지 전파되어 모진 박해를 겪은 후 종교자유를 얻어 세계화의 첫걸음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된다.

 

즉 복음이라는 소프트웨어(software)를 로마 제국의 조직과 제도라는 하드웨어(hardware)속에 끼어 넣으면서 교세 확장에는 성공했으나, 복음의 생기가 상실되고 예수님이 가장 거부했던 법과 형식으로 무장된 하나의 거대한 조직과 집단으로 변질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부분에서 복음적 표현이란 어디까지나 이 조직의 이익과 체면 유지의 차원에서 가능하다는 제한도 받게 되었다.

 

수도생활은 종교의 최고 경지를 살고자 하는 열망에서 시작된 것이기에 어느 종교에도 수도생활의 형태가 존재하고 있으며, 가톨릭 교회는 수도생활의 심화차원과 양과 질에 있어 다른 종교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면서도 다양하며 풍요로운 전통이 지니고 있다.

 

역사 안에서 성령의 바람처럼 복음적 자유를 살고픈 열망으로 시작된 수도생활도 교회라는 제도 아래 속하게 되면서 복음에 대한 전적인 투신이라는 수도생활의 목표는 교회의 법과 제도라는 틀 안에서 실천되기 시작했고 이것이 수도생활의 핵심인 카리스마를 허약하게 만들면서 하나의 조직으로 변질시키는 결정적인 우를 범하게 만들었다.

 

근래 약 70년 쓰여진 어느 프랑스 여의사의 일기가 영화화 되면서 제도로서의 교회와 수도회가 숨기고자 애썼던 부끄러운 사실을 통해 오히려 이 세상에 새로운 복음적 감동을 줄 수 있는 사건으로 변모된 것을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 교회의 이익을 위하고 교회를 지킨다는 목표 아래 치부를 숨김으로서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어리석은 일을 저지른 것이 교회 사랑이 지극하다고 자부하는 일부 교회 지도층 성직자들의 업적(?)이라면, 이 영화에서는 수도자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인간적 차원에서 접근함으로서, 상처를 치유하고 수도회를 복음적 사랑으로 충만한 집단으로 쇄신시키고 수도자에 대한 잔잔한 감동을 일으키게 만든 것은 무신론주의자인 여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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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폴란드에서 일하고 있는 프랑스 적십자 병원에 느닷없이 폴란드 수녀가 찾아와 다급한 도움을 청한다. 폴란드는 가톨릭 국가이기에 수많은 교회 병원도, 이들을 도울 교회 기관도 있을 텐데 이 수녀는 생면부지의 프랑스 적십자 병원에 와서 도움을 청했다. 공산주의자이며 무신론자인 여의사 마틸다는 도움을 청하는 수녀를 따라 수녀원을 방문하면서 끔찍한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이 수녀원 안에는 당시 폴란드를 번갈아 침략했던 러시아와 독일 군인들의 강간으로 수녀 7명이 임신 상태에서 극도의 불안과 수치심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사건 해결의 책임과 권한이 있는 수녀원장의 태도가 제도로 무장된 교회의 모습을 너무도 정확히 표현하고 있었다. 원장 수녀는 철저히 숨기는 것을 수녀원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라 생각하며, 외부로 이 소문이 나지 않게 차단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이처럼 철저한 은폐가 원장 수녀의 확고한 방침이었으나, 동시 다발적으로 강간당한 수녀들에게 출산의 고통과 공포가 시작되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 숨기고 있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란 생각을 하게 된 마리아 수녀가 프랑스 여의사 마틸다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일생을 그리스도의 정배로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아름답게 살던 수녀들이 적국 군인들의 강간에 의해 임신을 하게 되면서 수녀들은 기도 안에서 이런 절규를 한다.


"주님의 어린 양이라(Agnus “Dei) 믿고 살아온 저희에게 어떻게 이런 비참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수녀들이 두렵고 수치스러운 출산의 악몽 속에서 하느님께 매달리는 마음으로 바친 이들의 기도가 너무 애절했다.

 

수녀들이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청하는 대림절 찬가인 하늘은 이슬처럼 의인을 내려다오: Rorate coeli desuper et nubes pluant”라는 이 절박한 기도의 해답이 그들이 속한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온 게 아니라 엉뚱하게도  무신론자인 여의사로부터 오게 되었다.

 

이 와중에서 수녀들은 계속 해산을 하게 된다. 어떤 수녀들은 강간으로 이어진 임신이 정결서약을 어긴 것이라는 부담 때문에 임신 사실 자체를 부정하며 지내다 놀랍게도 평범한 일과 속에서 유산하듯 아기를 출산하기도 했다.

 

여의사 마틸다는 비밀스럽게 이 수녀들을 도우는 과정에서 자신이 속한 적십자 기관으로부터 오해와 질책을 받으면서도 이 수녀들을 도우면서 서서이 무덤과 같던 수녀원에 생명의 빛을 비치기 시작했다.

 

아무도 믿을 수 없고 자기들의 아픔을 하소연할 곳이 없어 은폐로 전전긍긍하던 수녀들에게 이 여의사는 위로의 천사로 다가왔다.


당신이어야만 했어요. 우리의 구원자

 

수녀들은 이 여의사를 통해 출산 사실을 숨기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이들의 임신은 하느님 안에서 특별한 방법으로 생명을 선물 받은 차원에서 받아들임으로써 죽음과 수치심의 공동체에 생명과 기쁨이라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여의사에 제안에 동의한 수녀들은 동시다발적으로 4명의 수녀들이 출산한 아이들을 수녀원에서 키우자는 것으로, 마음을 모음으로써 이 수녀원이 복음적인 기쁨과 희망이 넘치는 생명 공동체로 변신했다.


이런 결정은 또한 수녀로 살아남기 위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입양시키고나서 , 수녀들이 겪어야 하는 슬픔과 죄책감에서도 해방되게 만들었다.

 

이 충격적이고 끔찍한 기억으로 임신한 수녀들은 무신론자인 마틸다의 인간애를 통해 자기들의 처지가 그들이 대림 성탄절 전례를 통해 아름답게 찬미해온 하느님이 원하시는 동정녀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여라.” (루카 1: 23)

 

수도생활 역사에서 독신과 정결의 가치는 항상 우선시되었으나, 성서적인 정결은 단순한 독신 신분으로 성생활의 포기보다 더 넓은 차원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신체적인 순결, 즉 정결의 목표가 깨끗한 것으로 확대 해석되면서 정결은 큰 사랑의 삶이란 것을 질식시키는 실수를 범했으며 아직도 범하고 있다.


정결의 이상이 깨끗한 것이 되면 이 깨끗함을 유지하고 보여주기 위해선 이 수녀원 원장이 보인 위선과 이중성으로 점철될 수 있다. 원장 수녀는 초기에 어떤 수녀가 낳은 아기를 몰래 바구니에 담아다가 누군가 필요한 사람이 데려가리라는 굳은 확신으로 사람들이 다니는 길가 십자가 곁에 유기한다.

자기 아기가 없어진 것을 알게된  수녀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충격속에서 자살을 선택하는 비극도 연출되었다.

 

네팔 힌두교에는 순결에 대한 잘못이 비참한 인생으로 만드는 쿠마리 라는 제도가 있다. 이것은 신체적 순결은 신격화시킨 제도로서 3세에서 6세까지의 소녀 중에서 여러 시험 과정을 거쳐 합격한 여아에게 쿠마리라는 여신의 호칭을 부여하면서 사원에서 지내게 만든다.

 

쿠마리의 일과는 축일이 되면 예쁜 화장을 하고 사원 발코니에서 신도들을 축복하는 것이며 그 대가로 공주와 같은 대우를 받게 된다.

 

헌데 이 아이가 사춘기가 되어 생리를 시작하면 불결한 여자가 되어 사원에서 퇴출당하고 또 쿠마리 출신의 여자와 결혼하면 불행해진다는 미신 때문에 이들은 결혼도 바로 하지 못하고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되는 제도가 아직도 네팔 힌두교에 건재하고 있다.

 

여러 복합 요인이 있겠지만 오늘날 교회와 교회의 핵심 단위인 수도생활이 매력을 잃고 있다.

 교회는 썰렁해지고 수도회는 성소자가 급감한다는 것의 중요 이유 중 하나는 교회 안에서 예수를 만나기 힘들고, 수도생활도 구호는 미끈하고 거창하면서 복음의 신선하고 자유로움보다 제도 유지와 조직 확장을 위해 만들어진 많은 인위적인 것들이 더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실망스러운 현실에도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런 교회의 현실에서 예수의 제자로서 살고 싶은 크리스챤이라면 외부로부터 복음을 수혈하는 과감한 모험을 해야 할 것이다.

 

중국 고승들의 법어집에 나오는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 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으로, 서로 합심하여 일이 잘 이루어지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제도적인 교회는 어둠을 감추기 위해 무척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은 감추어서는 안 되고, 빛과 어둠을 아우르지 못하면 장님이 된다는 것을 오늘 교회 현실에서 볼 수 있다.

 

이 수녀들은 마틸다라는 무신론자의 선의를 수용함으로서 자기들이 만든 불안과 염려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모성의 성장을 목표로 하는 정결의 삶을 더 멋지게 살아갈 수 있는 수도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강간이 주제인 영화를 어쩌면 이토록 깨끗하게 만들 수 있는지 안느 퐁텐(Anne Fontaine)이라는 여류 감독의 세련된 처리가 더 돋보인다.

 

감독은 이 영화 전체를 통해 수녀들이 결코 불결한 여인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받는 모성이 성숙된 동정녀임을 드러내는 분위기를 창출했다.

 

 감독은 작품을 통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인간뿐이다.”라는 무신론자의 폭탄선언을 하고 있다.

 

위선과 이중성으로 교묘히 위장된 교회의 허구를 찌르는 충격 선언이다.


그러나 강간과 같은 치욕적인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께 온전히 신뢰하며 맑은 삶을 살아간 이  수녀들의 삶 안에서 이 말은 거꾸로 해석될 수 있다.


더 없이 치욕적인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신 주님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인간인 크리스챤들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역설적반론이다.

 

이런 관점에서 깊은 생각에 빠지게 만드는 큰 역설이 제시된다.

비크리스챤과 크리스챤의 역할에 이해하기 어려운 구분이 생기게 된다.

 무신론자인 여의사 마틸다는 공의회 문헌이 제시하는 익명의 크리스챤이며, 이 사건을 외부로 알려지지 않도록 숨기는 것을 최대한의 능사로 여기며, 아기를 길거리에 내다 버리는 원장 수녀야 말로 실천적 무신론자이다.


여러 면에서 이 영화는 이번 부활절에 읽어야 할 현대판 복음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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