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아니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
저는 오늘 독서와 복음에 비추어 다음과 같이 생각해봤습니다.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우리.
하느님 집에 쓰이는 우리.
하느님 집을 짓는 우리.
먼저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하며
그것은 우리가 있을 곳을 미리 마련하려고 가시는 거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당신이 아버지의 아들인 것처럼 우리도 아버지의 아들이니
아버지 집은 우리가 있을 곳이고 그래서 가야할 곳이라는 얘기이며
당신이 아버지 집에 가는 것처럼 우리도 아버지 집에 가자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당신이 먼저 아버지께 가심으로써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먼저 닦으시고 아버지께 가는 길이 되신 분이시며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주님을
하느님 아버지께로 가는 우리의 길로 선택하고 주님께로 나아가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런데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생각지도 않고
아버지께 갈 마음이 없는 사람은 아버지께 가는 길이신 주님도 필요치 않고
그래서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은
베드로 사도의 말처럼 버림받는 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버림받다!
버림받는 것은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하는 것이고,
보통 주인이 종을, 힘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버리는 법인데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님께서 우리에게 버림받으신 것입니다.
실상 인간은 하느님의 버림을 받지 않지만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버림받은 돌인 주님을 그러나 하느님께서
당신 집의 모퉁이 돌로 삼으시는데 베드로 사도는 우리도
하느님 집에 쓰일 살아있는 돌들이 되라고 합니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 여러분도
살아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런데 하느님의 집에 살아있는 돌로 쓰인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느님 집안의 사제나 일꾼이 된다는 것입니까?
그런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라고 덧붙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이 하느님 집안의 일원이 될 뿐 아니라
하느님 집안이 번성토록 하느님의 사제와 주님의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이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김씨 또는 박씨 집안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또
아들딸 손자를 낳아 집안을 번성케 할 뿐 아니라 자기 집안을 일구는데
이제는 더 이상 이 세상의 집안이 아니라 하느님 집안의 일원이 되고
하느님 집안을 일으키는 사제와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육신의 아버지와 결별하며 “이제까지 저는 당신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하느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자유롭게 부르게 되었습니다.”고 외친 프란치스코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다음 “가서, 허물어져가는 나의 집을 고치라!”는 사명을
충실히 완수한 프란치스코처럼 무너진 하느님 집안을 고쳐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고칩니까?
역시 프란치스코처럼 찾아가 흩어진 돌들을 하느님 집안으로 모으는
그런 방식으로 고칩니다.
교회로부터 버림받고 그래서 흩어진 돌들을 쓸모없다고 여기지 않고,
소중히 여기고 찾아가 모셔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버렸어도 하느님은 당신을 소중히 여긴다고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