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며칠 전 잠자던 중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저의 막내누나가 전화를 한 것인데
제가 일찍 잠자는 것을 알고도 전화를 건 것입니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겼나 놀랐는데 목소리가 흥분되어 있었기에
직감적으로 ‘안 좋은 일이 아니라 좋은 일이구나!’
‘이렇게 잠자는 저를 깨울 정도의 좋은 일이라면
제 조카며느리가 임신했다는 소식이겠구나!’
몇 초 안 되는 시간인데도 감이 즉시 왔습니다.
제 조카들 중에 유일하게 아이가 없던 조카며느리였고,
첫 아이를 사산한 뒤 몇 년이나 아이가 생기지 않아
본인들과 가족은 물론 저도 계속 기도를 하던 중이었지요.
또 다른 기쁜 소식도 지난주일 받았습니다.
저와 함께 북한 평양에 공장을 짓고 사업을 하다가
남북관계의 악화 때문에 사업을 다 날리고 그 동안
그 피해보상을 받기 위해 9년을 정부와 싸우던 분이지요.
정권이 바뀌면서 정부가 보상을 해주기로 했다는 소식입니다.
더 앞서서 교통사고로 거의 식물인간이던 친구의 딸이
의식을 되찾은 기쁜 소식까지 제게는 요즘 기쁜 소식이 이어집니다.
이런 일이 별로 없었는데,
내가 기도해서 하느님께서 들어주신 적이 별로 없는데
연달아 기쁜 소식이 전해져오니 기쁘면서도 이상하기도 하였습니다.
뭐지? 하느님께서 왜 이러시지?
그리고 신앙인답지 않게 이런 불길한 생각까지 드는 것입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데 혹시 크게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닌지?
그런데 사실 기쁨이라는 것이 본래 고통의 짝이며
고통 때문에 기쁨이 더 귀해지고 커지는 법입니다.
왜냐면 기쁨이란 본디 소유의 기쁨이요 성취의 기쁨인데
무엇을 소유하고 성취하기까지 치룬 대가만큼 기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집을 갖게 되었어도 아무 고생 없이 부모가 사준 집은
부부가 수십 년 고생고생해서 산 집의 기쁨과 비교할 수 없고,
똑같이 시험에 붙었어도 한 번에 덜컥 붙은 사람은
여러 번 낙방한 끝에 붙은 사람의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지요.
세상 기쁨의 이치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영적인 기쁨은 얼마나 더 많은 고통과 상실을 동반하겠습니까?
귀한 것을 얻을수록 기쁨이 크지만
귀할수록 얻기 어렵고 많은 돈을 줘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이 그 무엇보다 귀하고
그래서 하느님을 얻는 것이 그 어떤 것을 얻는 것보다 더 기쁘며
이 기쁨을 위해 어떠한 고통도 감수하고 감당할 의지가 있습니까?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기쁨은 그저 아들을 얻게 된 기쁨이 아니고,
아들들을 통해 구원역사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오는 기쁨이며
그러니 두 분의 만남도 이런 기쁨을 나누기 위함이 아니지요.
두 분의 만남은 두 분에 대한 성령의 역사를 같이 확인하고,
하느님의 계획을 같이 이루어가기 위한 일종의 단합대회입니다.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하느님의 계획과 구원사업이
자기들로 인해서 좌절되지 않게 하자고,
아들을 내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 아들로 키우자고 같이 다짐했을 겁니다.
저의 조카와 며느리도 아이의 임신을 이렇게 영적으로 기뻐하고
태어날 아기도 하느님의 아들로 키웠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