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윌리엄 블레이크(Willam Blake) : 성직 매매 교황 (1824- 1827)

by 이종한요한 posted Jun 10, 201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 - Up Down Comment Print

성직매매 교황.jpg


제    목 : 성직 매매 교황 (Simonaic Pope:1824- 1827)

작    가 : 윌리엄 블레이크(Willam Blake)

크    기 : 수채화 57.2cm X 36.8Cm

소재지  : 영국 런던 테이트 미술관

 

올해는 가톨릭교회의 부패에 저항해서 마르틴 루터로 대표되는 종교 개혁이 시작된 지 500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종교개혁의 원인제공을 했던 가톨릭 교회의 부패나, 여기에 대해 반기를 든 개신교나 다 겸허하게 이 사건을 자기 정화와 반성의 계기로 만들고 있는 자랑스러운 현실이다.

 

가톨릭 교회가 개신교 측의 반대를 받게 된 것은 여러 요인이 있으나 그중에 첫째가 부패한 교회이며 특히 교황청과 연루된 고위 성직자들의 부패였다.

 

이태리 시성 단테는 그의 불후의 명작 신곡에서 부패한 교황으로 평가되는 교황 첼레스티노 5, 보니파시오 8, 니콜라오 3, 요한 22, 클레멘스 5세 등을 등장시키는데 이는 당대의 부패하고 무능한 교황들을 비판하면서 이들을 지옥으로 보냈다.

 

당시 교황들을 지옥에 보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누구 못지않게 교회를 사랑했던 단테는 사랑하는 교회를 정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이런 과감하고 충격적인 시도를 했으며 이것은 교회 역사에 남을 고귀한 예언성의 표현이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시작하기 전에 가톨릭교회는 부패한 세력들로 가득 찬 것이 아니라 소수로나마 개혁 세력들이 교회 정화와 쇄신을 위해 노력을 해왔다.

 

작가는 영국에서 태어나 거의 독학으로 공부해 많은 신비시를 발표하고, 시집의 삽화를 그리면서 화가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철저히 신비적 성격을 띠고 있기에 자연이나 인물의 외관을 묘사하는 전형적인 방법에서 탈피해 깊은 묵상 중에 얻은 것이 아니면 중세 역사에 등장하는 사건 속에 드러나는 것들을 작품의 주제로 삼았다.

 

이런 저자에게 시대를 앞서 르네상스 인다운 기치로 당시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의 부패를 공격하다가 50년 인생에서 19년을 추방과 유랑의 세월을 보내면서 작성한 불후의 명작인 신곡은 작가의 작품 활동에 큰 영감의 주제가 되었다.

 

작가는 단테의 신곡에서 100개의 주제를 선택해서 작품으로 남기고자 했으나 완성하지 못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이 작품이며 성직매매에 관여함으로서 중세 부패한 교황이었던 니콜라오 3세의 종말에 관한 것이다.

 

작가는 시대를 초월한 특별한 화풍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시화에서는 괴이한 신비가 나타나고 상식에 기초한 기법이 아니므로 그 선묘(線描)나 음영에서 생생히 호소하는 설득력을 나타내어, 그의 작품을 시대를 뛰어넘어 현대 감각에 연결된다.

 

그는 사진을 찍듯 정확하게 자연을 그리는 것을 경멸하면서 신비롭고 상징적인 상상의 세계를 구사하여 사람들을 새롭고 더 순수한 진실로 초대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했다.

 

이 작품의 등장하는 주인공은 중세 부패한 교황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니콜라오 3세 교황이다.

 

니콜라오 3세 교황(1277- 1280)은 이태리의 명문인 오르시니 가문 출신으로 교황이 되어 교회 지도자로서 여러 일들을 많이 했으나, 아쉬운 점이라면 가족 정서가 남달리 끈끈한 이태리인들이 빠지기 쉬운 가족 친척에 대한 과도한 사랑의 표현인 족벌주의(Nepotism)에 연루되어 추문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의 임기 중 친인척 3명을 추기경에 앉히고 조카들을 돕기 위해 성직 매매를 한 것이다. 당시 부패한 교황들에게 성직매매는 관직 매매처럼 알토란같은 수입원이 되었기에 이것이 전염병처럼 퍼지게 되면서 돈을 주고 고위직을 차지한 저질 성직자들은 교회 파괴의 원흉이 되고 있었다.

 

이 장면은 신곡 지옥 편 19장에서 단테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와 지옥을 방문했을 때 만났던 성직 매매에 연루된 교황에 대한 내용이다.

 

단테는 지옥을 방문했던 시기는 주님 부활의 아침인 49(성토요일) 아침6시 경이었다.

단테는 성직매매(聖職賣買)의 원조(元祖)격인 시몬(사도행전 8:9-24)과 교회 안에서 성직매매로 교회 부패에 일조를 한 졸개들을 책망한다.

 

그러나 단테가 분노하고 경멸해서 지옥에 빠트린 이 교황에게는 다른 인간적 면모도 있었다.

 

니콜라오 3세는 인상적인 태도와 위엄 있는 성품의 소유자였으며, 단테는 그가 족벌주의와 탐욕 때문에 지옥에 떨어졌다고 묘사했으나, 동 시대의 연대기 작가는 과도하게 호의를 베풀 친척만 없었더라면, 그에게 필적할 만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라는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성직매매에 연루된 것이었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 19편 제 3 구덩이에서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동반한 단테는 성직과 성물을 매매한 죄인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중에는 놀랍게도 교황 니콜라스 3세가 있는 것을 보고 당시 교회 지도 계급인 고위 성직자, 그 중에서도 교회의 으뜸인 인물의 타락한 모습을 보면서 탄식을 한다.

 

신곡 지옥편 19곡은 이 기막힌 장면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나는 입을 떼어 아, 말뚝처럼 박히어 거꾸로 선 너는 누구이뇨?

슬픈 넋이여, 말이 있거든 일러보라,”

 

나는 마치 저 믿음을 저버린 암살자가 구덩이에 든 다음에도 죽음을 늦추고자 거듭 제 죄를 듣도록 불러 세운 한 신부처럼 섰더니,

 

저는 소리치되, “진작부터 너 여기 있었느냐, 보니파시오야, 진작부터 너는 여기 있었느냐, 기록이 나를 속여 몇 번이나 틀렸도다.” (46-52)

 

단테는 지옥에 있는 교황 니콜라오 3세를 당시 부패한 교황의 대명사로 평가되던 보니파시오 8세 교황으로 보고 다음과 같은 넋두리를 쏟아 내고 있다.

 

베드로 사도에게 오롯히 열쇠를 맡기시기 전에 어떠한 값을 그에게서 요구하셨는지, 진정 나를 따르라, 하신 말씀 밖에는 무엇도 아니 요구하셨도다.”

 

죄스런 영혼이 잃어버렸던 그 자리에 마티아가 뽑히었을 때, 베드로나 다른 누구도 그한테서 금과 은을 받았지 않았더니라.” (91-92)

 

황금과 은을 너희가 천주로 삼았으니 우상숭배자들과 너희가 다를 것이 무엇이뇨? 저들은 하나를, 너희는 백을 숭배하는 것뿐이로다.” (112) - 최민순 신부 번역본 인용

 

단테는 묵시록 17장에 나타나고 있는 탕녀의 내용을 인용하여 성직매매의 사악함을 고발하고 있다. 단테에게 성직매매에 연루된 인간은 세상을 타락시키는 탕녀에 비길 수 있다는 격한 표현을 한다.

 

내가 본 물, 곧 탕녀가 그 곁에 앉아 있는 물은 백성들과 군중들과 민족들과 언어들이다. 그리고 네가 본 열 뿔과 그 짐승은 탕녀를 미워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여자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알몸이 되게 하고 나서, 그 여자의 살을 먹고 나머지는 불에 태워 버릴 것이다.”(15- 16)

 

작가는 성직매매에 연루된 사악한 교황들이 주머니 같은 곳으로 들어가 머리를 밑으로 처박힌 상태에서 발은 뜨거운 불이 붙어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했다.

 

이태리 명문인 오르시니 집안 출신의 교황 마르티노 3세가 탐욕에 빠져 자기 조카들을 위해 성직매매라는 가증스러운 죄에 빠진 상태의 불행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네가 진정 암곰의 아들이었더니 , 어찌나 새끼 곰들 의 번영을 위하였던지 세상에선 제물을, 여기선 몸뚱이를 전대 속에 넣었노라.

 

나보다 먼저 성직매매를 범한 놈들이 내 머리맡에 끌러 오게 되어 바위 틈바구니에 납작해져 있느니라. (70-73)

 

그러나 네가 이렇게 곤두서서 내 발목이 달구어진 시간을 저 자가 벌건 발을 들이박고 설 시간보다 오래리니.”(79)

 

작가는 5세기 이전을 살았던 단테가 가톨릭교회의 부패를 지적하고 공격했던 것을 위선과 이중성에서 해방된 진정한 크리스챤의 태도로 보고 이것을 작품화하면서 자기 시대에도 미래에도 있을 모든 인간적 위선의 상징인 부패에 대한 강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인간이 몸담은 세상엔 어떤 인간 집단이던 정도의 차이를 두고 부패할 수 있으나, 종교 집단의 부패는 좀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가장 부패하지 말아야 할 집단이 부패하기 가장 쉽고 종교 집단이 부패했을 때 그 추악성은 어떤 인간 집단과도 비길 수 없는 악취를 풍기는 것임을 역사는 전하고 있다.

 

그러기에 종교 집단은 어느 인간 집단 못지않게 자신의 부패에 대한 명민한 태도를 지녀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부패를 감추며 위선적인 태도로 결백을 가장 하다가 그 안에 잠복했던 악이 드러나면서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근래에 가톨릭교회가 성직자들의 성추행 문제로 세상에 실망을 준 것은 좋은 예의 하나이다.

 

교회가 이 사실을 인정하고 솔직한 반성의 태도를 보였다면 훨씬 치유가 쉬웠을 것을 감추기에 연연하다가 문제를 더 확대하면서 많은 선의의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종교의 존재성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가 팽배하게 만들었다.

 

이 작품은 단테 신곡의 작가의 시대에 생길 수 있는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이며 또한 현대판 경고이기에 신비적이고 비현실적인 표현이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1265년 아름다운 꽃의 도시 피렌체에서 몰락한 귀족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난 단테는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힘든 시절을 보내지만 아름답고 영원한 빛을 찾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가 10살 때, 그는 어느 귀족 파티에서 도시의 유력자인 폴코의 딸 베아트리체(9)를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 였던 그는 한눈에 반하게 되나, 그들의 첫사랑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9년이 지난 1283년 그의 인생에, 아르노 강 위에 놓인 베키오 다리에서 우연히 서로 만나 인사를 건넨 후, 그녀를 향한 사랑의 시를 쓰기 시작할 만큼 단테는 맑고도 뜨거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신체적 접촉은커녕 말 한 번 제대로 나눠보지 못한 베아트릭스에 대한 그의 사랑은 아름다운 시로 승화되어 많은 후대인들에게 순수한 사랑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당시 피렌체사회는 교황을 지지하는 구엘프당과 황제 파 기벨린당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고, 구엘프당은 다시 상인들이 주류인 비앙키당과 귀족들의 집단인 네리당으로 갈라져 투쟁하고 있었다.

 

단테는 비앙키당으로 정계에 입문하면서 탁월한 지성과 언변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행정부 최고위원 3인 중 1인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301년 네리당이 집권함에 따라 그는 결국 궐석재판으로 유죄 선고를 받고 죽을 때까지 19년간 타국을 유랑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유배의 아픔 속에서 신곡 외에도 향연, 속어론(俗語論)'등 불후의 작품들을 남겼다.

 

참고로 2008년 피렌체 시는 단테의 추방 선고를 취소하고 그를 사면하면서 라벤나에 있는 그의 무덤을 피렌체로 옮기고자 했으나, 라벤나 시의 반대로 무산되면서 피렌체 시는 명사들의 무덤이 있는 산타 크로체 성당에 단테의 가묘(假墓)를 설치하고 성당 앞에 거대한 단테의 입상을 세웠다.

 

베네딕도 15세 교황은 단테 사후 5세기가 지난 때, 5명의 교황을 용감히 지옥으로 보낸 단테를 칭송하는 글을 남겼다.

 

작가가 단테의 작품을 회화로 재해석한 것은 인간 삶에서 진실의 고귀성과 함께 이것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었다는 면에서 그는 가톨릭교회 밖에서 교회의 쇄신을 도운 개혁자로 볼 수 있다.

 

종교 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목표는 과거의 잘못의 폭로가 아니라 오늘 종교가 서야 할 바른 자리를 찾고자 하는 시도라면 이 작품이 오늘의 종교계에 던지는 교훈을 대단하다.

 

교회는 성서의 가르침과 이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교리를 반복 강조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수용의 효과란 면에 있어서는 화려하면서도 허황한 언어의 유희로 끝나게 되는 안타까움을 자주 보게 된다.

 

한마디로 회개라는 복음의 핵심 실천의 관점에서 설득력이 약하는 것이다. 단테는 교회의 권위가 하늘과 같던 현실에서 부패한 교회의 지도부를 용감히 고발했고 5세기가 지난 후 작가는 이 작품을 재해석함으로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할 교회에 역발상의 지혜를 제공했다는 면에서 이 작품의 저자 윌리엄 블레이크는 예술과 크리스챤 신앙의 관계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예술을 모르는 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크리스챤이 아니다.”

    

성직매매 교황.jpg 

 

 

 

서비스 선택
<-클릭 로그인해주세요.
댓글
?
Powered by SocialXE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