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의 선행이 의로운 것이 되어야 함을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올바른 선행은 어떤 것이고
옳지 않은 선행은 어떤 것인지 얘기합니다.
그런데 선행에 대해서 세심하게 따져보지 않은 단순한 사람에게는
선행에 무슨 올바른 것이 있고 옳지 않은 것이 있는가?
선행은 다 옳은 것이 아니가?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악행이 난무하고, 그 악행도 점점 더 포악해져가는 세상이고
그래서 선행이 귀하기만 한 오늘날인데 어떤 선행이건
선행을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귀하고 족하다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올바른 선행을 얘기함은 선행이 올바른 것이어야
너에게도 나에게도 참 행복을 가져다주고
더 나아가 구원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우선 올바른 선행은 순수해야 합니다.
선행에 어떤 다른 목적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선행에 꼭 목적이 있어야 한다면 너와 나의 영적인 유익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선행이 어떤 목적이 있고 그것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선행이 아니라 거래행위/상행위일 뿐입니다.
환심을 사기 위해서 뇌물을 바치는 것처럼
칭찬을 받기 위해서 선행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올바른 선행, 순수한 선행은
또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합니다.
사랑이 선행의 동기가 되지 못할 때 동기가 순수하지 않아
선행의 목적도 자기의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선행이 올바른 선행이라면 어떤 목적도 없이
오로지 사랑에서 비롯된 순수한 선행이어야 하지만
그 사랑도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사랑이어야 합니다.
선행은 사랑에서 비롯되고,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수하게 사랑하지 못하고 꼭 뭔가를 바라고 선행을 하는 이유가
선행을 하고나면 나에게 남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조금 있는 돈 주고나면 나에게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 조금 있는 돈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조금 줘도 남아 있는 것이 많은 사람, 곧 부자가 줄 수 있고
줘도, 줘도 또 생기는 구석이 있는 사람, 역시 부자가 줄 수 있는 거지요.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면 부자가 더 인색하다고 즉시 반박을 할 겁니다.
그렇지요. 재물이 부자여도 사랑이 가난하면 인색하고,
그럴 경우 부자일수록 더 인색한 것이고, 더 인색해보입니다.
그래서 선행을 하려면 재물도 부자여야 하지만 사랑이 부자여야 합니다.
아니, 재물은 그리 부자가 아니어도 사랑이 부자여야 하는데
사랑의 부자가 되려면 그 사랑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사랑의 우물, 끊이지 않고 샘솟는 우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없이는 사랑의 부자가 아닙니다.
샘솟는 우물이 우리 안에 없기에 있는 사랑 톡 털어서 선행을 하고나면
사랑도 선행도 금세 고갈되어 버리고 말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을 깊이 새기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