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창세기는 마침내 아브라함이 본처에게서 자식을 얻게 되리라는
하느님의 약속 얘기를 들려주는데 이에 아브라함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이 백 살 된 자에게서 아이가 태어난다고?
그리고 나이 아흔이 된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 말은 불신의 말입니까? 무슨 말입니까?
아니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마음속으로 이 말을 했다하니 하느님의 약속에 빈정대는 것입니까?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얘기하는데
이것을 보면 아무리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일지라도 이때까진 아직
완전한 믿음에 도달한 것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완전한 불신도 아닌,
다시 말해서 의구심 또는 반신반의의 상태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렇게 불완전한 믿음에서 완전한 믿음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역사를 보면서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부르심을 받으며 복을 받고 복을 주는 사람이 될 거라는 약속을
75세에야 받은 것도 늦은 나이인데 후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뒤에도
86세에 이르러서야 하느님께서는 이집트 종에게서 후손을 주시었고
99세에 이르러서야 사라를 통해 후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86세에 사라의 여종으로부터 자식을 낳았을 때 아브라함은
후손을 별처럼 많게 주시겠다는 약속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하고
어쩌면 체념을 했을지도 모르는데 99세가 되어서야 본처의 자식을 주신다니
이렇게 하시는 하느님이 왜 그러시는지도 이해가 가지 않았을 것이고,
자기 나이는 그렇다 치더라도 90세의 사라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 의구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실 거면 빨리 주시지 왜 이렇게 애타게 하고 주시느냐고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대답이 바로 믿음의 담금질입니다.
믿음이란 본래 담금질의 결과입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도 믿음이기도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믿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쇠가 쇠이기는 하지만 담금질을 전혀 하지 않는 쇠는
무르기가 이를 데 없어서 쇠라고 하기도 어려운 건데
담금질을 거듭 하면서 비로소 쇠다운 쇠가 되는 거잖아요?
아브라함은 25년의 담금질을 통해서 믿음이 굳어지고
또 그 아들을 봉헌하라는 담금질을 통해서 더 굳어졌지요.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도 마찬가지로 그랬을 것입니다.
나병환자의 나이가 몇인지 그리고 몇 살에 나병에 걸렸는지
오늘 복음은 얘기해 주지 않지만 긴 시간의 큰 단련을 받아
오늘과 같은 믿음의 고백이 나왔을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희망이란 절망의 상황에서 희망하는 것이듯
믿음이란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믿는 것이고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믿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이런 능력이 어떻게 생깁니까?
거저 생깁니까?
믿음도 주님이 주시는 것이니 거저 생긴다고 할 수 있지만
주님이 주시되 단련과 담금질을 통해서 주시는 것이니
거저라고만 할 수도 없겠지요.
아브라함은 25년, 아니 100세까지의 믿음의 담금질 끝에 아들을 얻었는데
나는 지금 믿음의 담금질을 몇 년째 하고 있는지 성찰케 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