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받아들임이 주제인 듯합니다.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 생각할 때 퍼뜩 떠오르는 말이 있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사람인데
우리는 이런 사람을 안 좋게 여기고 심지어 깔보거나 경멸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사람을 깔볼 자격이 있을까요?
우리 중에 이렇지 않은 사람이 솔직히 얼마나 됩니까?
예를 들어 고통과 죽음을 달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단 것을 먹지 않고 쓴 것을 오히려 먹는 경우는
단 것이 몸에 안 좋고 쓴 것이 오히려 몸에 좋음을 깨달은 때인 것처럼
우리가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경우는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에게 좋은 것임을 깨달을 때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유명한 경구가 있습니다.
죽기 전에 죽으면 죽은 다음 죽지 않고
죽기 전에 죽지 않으면 죽은 다음 죽는다.
이것은 오늘 주님의 말씀, 목숨을 얻으려면 죽고
잃는 사람이 오히려 얻을 것이라는 말씀을 바꿔서 얘기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을 머리로는 알더라도
우리의 몸이 받아들이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쓴 것은 마찬가지고, 싫은 것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프란치스코의 경우처럼 은총 체험이 필요합니다.
프란치스코는 나병환자를 보는 것이 너무도 입에 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던 것, 입에 단 것은 이미 다 포기했음에도
싫어하는 것, 입에 쓴 것은 몇 년을 거부하고 피해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피할 수 없는 길에서 나병환자를 만났고,
그때 기도를 드렸더니 나병환자를 껴안을 수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나병환자를 껴안은 것이 주님을 껴안은 것이 되어
그 다음부터는 입에 역겨웠던 것이 단 맛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을 만나는 인격적인 체험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느님 때문에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하느님 때문에 예언자를 받아들일 때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우리는 자기 입맛대로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를 받아들이면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실 인간은 매우 자기중심적이어서 내 맘에 들기를 바라고,
내 맘에 들면 받아들이고 들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 입맛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 자기중심성을 벗어난 것이고 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그것도 큰 사랑이지만
신적인 사랑은 아니고 하느님이 발생하는 사랑은 아닙니다.
하느님 없이 자기중심성을 벗어나기도 쉽지 않지만
설사 자기중심성을 벗어난다 하더라도 하느님이 빠져있다면
그것은 신앙인의 받아들임도 아니고 신적인 사랑도 아닙니다.
하느님 관상이 이뤄져야지만 자기를 완전히 버릴 수 있고
예언자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십자가와 십자가를 안기는 사람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음을
저와 여러분 모두가 깨닫는 오늘이 되시기를 비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