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함인가, 은총인가?
지난주일 저는 프란치스칸 선교교육을 했고 주일을 연중으로 지내지 않고
김 대건 신부님 축일로 지냈고, 지금 터키에서 선교중인 형제에게
주례와 강론을 부탁했습니다.
이날 저는 큰 자극과 도전을 받았고
미사를 드리는 내내 엄청난 열등감을 느꼈습니다.
진작 성 프란치스코에게 영적인 열등감을 느낀 적이 있지만
김 대건 신부님의 성지, 소팔가자를 방문하고 난 뒤부터는
김 대건 신부님에게 영적인 열등감을 느껴왔고 지난 주일에는
김 대건 신부님과 저희 형제에게 영적인 열등감을 곱으로 느꼈지요.
영적인 열등감이라면 그들이 영적으로 위대하고,
그들에 비해 저는 영적으로 초라하기에 느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들은 어떻게 그리 영적으로 위대하고 나는 왜 이리 초라할까?
그런데 김 대건 사제가 위대하고 제 후배 형제가 위대한 것이
그들의 위대함이고, 그들이 인간적으로 성취한 위대함일까요?
그런데 그들의 위대함이 그런 거라면 영적인 위대함도 아니고
그런 면에서는 제가 결코 열등감을 느끼지 않으며,
열등감을 느낀다고 말로 표현하고 싶지 않은 자존심도 있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위대함은 그들이 성취한 것이 아니고 은총이며,
그들의 영적인 위대함은 그러기에 은총 수락이 위대한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위대한 순교를 한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주님의 영이 그들이 위대한 순교를 하게 한 거고
그러기에 주님의 영과 영의 활동을 수락한 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세계에서는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첫 단추라 할 수 있는 수락이 중요하고 위대한 순교는 그 결과인데
첫 수락을 잘하신 대표적인 분이 바로 성모 마리아시고
우리의 수선 탁덕 김 대건 사제도 이 첫 수락을 잘하신 분입니다.
불과 15살 나이에 그 엄청난 수락을 하셨으니 말입니다.
저를 비롯하여 자기들의 수호자 축일을 지내고 있는
요즘 성직자들을 한 번 생각하면 그 위대하심을 더 잘 알 수 있지요.
요즘 성직자 중에 순교를 생각하며 사제가 되는 사람이 얼마나 되고,
순교까지는 아니더라도 자기를 바쳐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사제가 된 사람이 얼마나 될까를 생각할 때 더 그렇다는 뜻입니다.
아무튼 김 대건 신부님은 박해시대에 사제가 되려고 하였고,
당신이 신부가 되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 사제가 된 것입니다.
증조부 김 진후가 먼저 순교하였고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으니
자신만 순교치 않고 사제직을 수행할 거라고 생각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자신의 가족도 수난을 당할 것을 각오하고 사제직을 선택한 것입니다.
실제로 김 대건 신부님의 아버지 김 제준은
김 대건 신부님이 유학을 떠난 지 3년 되는 1939년 순교하는데
아들을 유학 보낸 것을 사위가 밀고했기 때문이고 이 충격으로
어머니 고 우르술라는 실성한 사람처럼 전국을 떠돌며 살았습니다.
실로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라고 하는
오늘 복음 말씀 그대로입니다.
자기 한 몸을 주님께 바치기 위해 신부되는 것은 그래도 할 수 있으나
자기 때문에 온 가족이 다 죽게 되고 고통을 받게 되는데도
신부가 되는 것은 참으로 수락하기 힘든 것이었을 겁니다.
가족 모두의 봉헌이 가족 모두의 구원이라는 믿음,
패가망신이 아니라 가문의 영광이라는 믿음,
김 대건 신부님 개인의 믿음만이 아닌 공동체의 믿음,
이런 믿음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위대한 수락임을
부러워하며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위대한 수락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