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말씀 자체로 우리 마음을 편하게 하고 가볍게 합니다.
1독서에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고 얘기하고
복음에서는 당신께 오라고 우리를 초대하시는데
아기나귀를 타고 겸손하게 오신다니 부담이 없고,
안식을 주겠다고 하시며 오라고 하시니 역시 부담이 없고 편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마냥 말랑말랑하게만 생각해도 될까요?
다른 곳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하셨는데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속임수입니까?
십자가를 지라는 것과 가벼운 짐을 지게 하겠다는 것 중에
어떤 말씀이 맞습니까? 둘 다 맞는 말씀이라면
십자가를 지되 가볍게 지라는 말씀인가요?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짐이나 십자가를 지지 말라고 하신 적이 없는데
그렇다면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오늘 1독서에서 어린 나귀와 임금이 나오니까
우리의 임금 곧 주님이 우리가 져야 할 짐이라면, 다시 말해서
주님이 내가 져야 할 십자가라면 그 짐은 가볍다는 뜻일 겁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형틀이고 그래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를 죽이는 것이고,
그래서 십자가를 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싫은 것이기에 십자가인데 그것을 지기 좋아하게 되거나 사랑하는 순간
그 십자가는 더 이상 십자가가 아닌 것이 되지요.
그리고 십자가가 아니라 온유하고 겸손한 주님을
우리가 어린 나귀처럼 사랑으로 태우면 가벼운 짐이 될 뿐 아니라
짐과 나는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짐을 지는 것이 기쁨이 되겠지요.
십자가를 지지 않고 주님을 지는 것이며,
억지로 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지는 것인데
이것을 가장 완전하게 보여준 분이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나병환자를 보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고
그래서 모든 ‘자기’를 버렸음에도 나병환자를 만나는 것은 두려워
몇 년을 그렇게 피해 다니다가 어느 날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결코 스스로 만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만난 것이고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는 유언에서 “내가 죄 중에 있었기에 그들을 보는 것이
역겨운 일이었지만 주님 친히 나를 그들 가운데 데리고 가셨다.”고 한 다음
그러고 나니 “역겨웠던 바로 그것이 단맛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용기를 달라고 기도한 후 나병환자를 껴안았더니
자기가 껴안은 것이 나병환자가 아닌 주님이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다음부터 내가 싫어하는 것이
더 이상 십자가가 아니라 주님이 되었고
그 십자가 지는 것이 더 이상 쓴맛이 아니라 단맛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임금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독서는 얘기하고,
하느님은 철부지 어린이에게 드러내 보이신다고 복음은 얘기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은 겸손하시기에 철부지 어린이처럼 겸손한 사람만
자기의 임금을 알아보고 자기의 임금을 겸손하게 태우기 때문입니다.
힘 있는 사람이 힘이 있으니 십자가나 주님을 잘 질 것 같지만
그는 질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질 마음이 없어서 지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 힘이 없고 겸손한 사람은 “왜 나에게?”라고 거부치 않고
그것을 내가 영광스럽게 지게 되는 십자가요 사랑으로 받아들입니다.
임금님이 다른 누가 아닌 나를 타고자 하신다면 영광이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고 난 저는 한숨이 나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