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구원과 자비에 대한 사도의 말씀을 읽으면서 즉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구원을 받고 싶은가?
나는 자비를 받고 싶은가?
그리고 하느님에게서 받고 싶은가?
그리고 또 생각했습니다. 받고 싶지 않다면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배가 불러서,
배부른 것은 아니지만 구원과 자비가 필요한 것을 인정치 않고 싶어서.
받고는 싶지만 하느님에게서가 아닌 다른 구원과 자비를 얻고 싶어서.
참으로 많은 사람이 자신이 비 구원 상태에 있음을 모르고
자기가 지금 누리고 있는 소시민적인 행복에 만족을 합니다.
과거 소싯적에 너무 욕심이 많아서 만족할 줄 몰랐다가
욕심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이제 작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게 된 것만으로도
행복을 얻었다고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복은 자기가 얻는 것이지 구원 받아 얻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자기의 불행을 인정치 않고 자기의 불쌍함을 인정치 않고 싶은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미사 때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하지만
옛날에는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했었지요.
그러니까 이 둘을 합치면 ‘지금 저는 제 힘으로는 불쌍하오니
주님, 자비를 베푸시어 구원을 주소서.’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내가 왜 불쌍해? 어디가 불쌍해?’하고
자신의 불쌍한 상태를 자존심 때문에 인정치 않으면
자비와 구원은 바라지도 않고 하느님께 바라지도 않게 되겠지요.
세 번째는 행복은 스스로 얻는 것이지
타자에게 받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타자에는 하느님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불교는 스스로 구원을 얻는 종교이고,
요즘 말로 하면 셀프구원을 얘기하는 종교입니다.
전통불교는 결코 신의 존재를 인정치 않고
신이라는 이름을 아예 입에 올리지도 않습니다.
대신 부처가 있는데 부처는 신이 아니라
깨달은 자이며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불교 신자들이 ‘성불成佛하십시오.’라고 인사하는 것이
바로 부처되라고 축원하는 것이지요.
첫째로 자신을 불행케 한 어리석음을 깨닫고
다음으로 행복의 이치를 깨달음으로 타자에게 의존치 않고
스스로 행복한 존재, 곧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을 강하게 체험하였고,
하느님 없는 자들의 불상함을 깊이 체험하였으며
하느님 없이 사는 죄스러움 또한 깊이 체험하였습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얘기하는데
나는 어떤 사람인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천만 번 아멘...
주님,
아무것도 아닌 저희 모두를
제발 불쌍히 여겨주소서
당신밖에 없는 저희 모두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저희 모두를 불쌍히 여겨주심을 믿기에 아빠의 품으로 숨어드오며 저희를 아빠께 그냥 다 맡기옵니다
저희 모두를 불쌍히 여겨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