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오늘 주님 말씀을 듣고 제가 저에게 물은 것은 이것입니다.
나는 어떤 자가 될 것인가?
표징을 요구하는 자가 될 것인가, 표징이 되는 자가 될 것인가?
주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당신 세대에게 <악한 세대>라고
크게 나무라시는데 그런데 표징을 요구하는 것이 왜 악한 겁니까?
사실 우리들 대부분도 하늘의 표징을 받고 싶어 합니다.
예를 들어 엄청 외로울 때나 위로가 필요할 때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표징이나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신다는 표징을 바라지요.
그런데 이렇게 겸손하게 하늘의 표징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은
하느님 사랑의 표시오, 갈망의 표시이니
나쁘다거나 악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 주님의 말씀처럼 요구하는 경우입니다.
사랑을 청하는 것과 사랑을 요구하는 것은 좀 다르지요.
‘사랑을 원하니 사랑을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과
‘사랑을 한다면 사랑을 보여줘 봐!’라고 하는 것은 큰 차이잖아요?
더 문제는 주님을 믿지 않으면서 믿을 수 있도록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이유가 교만이기에 필요한 것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이 아니라 회개인데 그럴 생각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요나의 표징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시는데
그렇다면 요나의 표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회개의 표징입니다.
요나 예언자는 회개의 표징이잖아요?
매우 역설적이게도 주님께서는 회개치 못하는 요나를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를 위한 예언자로 뽑으셨습니다.
그러니 요나는 아주 미칠 지경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며칠 전 강론에서 말씀드렸듯이 주님으로부터 도망을 칩니다.
그런데 주님을 피해 도망을 치지만 실은 주님으로부터 도망친 것이 아니라
회개를 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회개의 선포자가 되지 않겠다고
도망을 친 것이고, 이런 요나를 주님께서는 회개를 하게 하신 겁니다.
프란치스코가 회개할 수도 있도록 하느님께서는 전쟁에서의 패배,
감옥생활, 병상생활 등 여러 번 기회를 주셨는데도 회개치 못하니
피해 다니던 나환자와의 만남을 통해 회개생활을 시작케 해주신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요나 예언자도 회개를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신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분명 회개할 기회를 주셨을 것이고,
우리는 그 결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제 생각에 세례를 받은 사람은 다 회개의 표징이 되겠다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하늘의 표징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회개의 표징이 되어야 합니다.
도저히 회개할 것 같지 않은 우리가 회개해 가는 것,
이것이 진정한 하늘의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말이 있지 않습니까? 기적중의 기적이 회개라고 말입니다.
예를 들어 고칠 수 없는 병이 기도로 낫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이
도저히 회개할 것 같지 않은 교만한 사람이 회개하는 거라는 말이지요.
그러니 도저히 회개할 것 같지 않은 우리인 것도 사실이지만
이런 우리가 오늘부터 회개를 시작하여 회개의 표징들이 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