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오늘 말씀에는 두려워하라는 것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 같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일체 모든 두려움이 안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 쉽고
주님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만 하셨을 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떨쳐버려야 할 두려움이 있고 지녀야 할 두려움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지만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오늘은 조금 관점을 틀어서 보겠습니다.
피하고 떠나게 하는 두려움은 하지 말아야 할 두려움이고
머물고 함께 있게 하는 두려움은 지녀야 할 두려움입니다.
위험이나 위협은 닥칠까 두렵고
위험한 것이나 위해가 되는 사람은 두려워 피하게 합니다.
프란치스코에게 나환자가 그랬고,
주님 수난 후의 제자들에게는 유대 지도자들이 그랬으며,
뱀이나 지진이나 자연 재해 같은 것도 우리에게 그렇지요.
그런데 이런 두려움은 하느님이 우리 안에 안 계시고
다른 것들이 우리 안에 하느님 대신 있을 때 생기는 겁니다.
사랑이신 하느님 대신 다른 것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사랑 대신 우리 안에 두려움이 생기고
일단 두려움이 우리 안에 자리 잡게 되면
작은 위험도 두려워 피하게 할 뿐 아니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까지도 두려워 피하게 하지요.
그러므로 이런 두려움은 극복해야 할 두려움입니다.
나의 두려움 때문에 공연히 선한 사람을 악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도,
두려움에 자신이 자꾸 위축되다 못해 두려움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도
무엇보다도 두려움으로 인해 관계가 왜곡되고 단절이 되지 않기 위해서도
이런 두려움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하고 우리 안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반면 지녀야 할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우리를 떠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사랑과 사랑의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저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어언 4년이 지났습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어머니를 잃고 나면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이었고,
그래서 불리불안과 그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지만 신앙인이요 수도자에게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며 인정하려고 들지 않았었지요 그런데
지금 와서 저를 성찰할 때 어머니 사랑이 없는 제 사랑의 허약함을 봅니다.
모두 다 나를 버려도 어머니만은 나를 사랑해주실 거라는 믿음이 있었는데
이 무의식적인 믿음이 사라지고 하느님 사랑에 대한 영적인 믿음이
제 안에 자리하기까지 제 안에 갖가지 두려움들이 자리하고 그래서
전과 비교하면 소심하다싶을 정도로 조심하고 작은 것도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주님이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세상폭군과 비교하여 더 큰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참새마저도 귀히 여기시는 하느님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해야 한다는 거지요.
어머니 살아계실 때는 어머니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래서 어머니 사랑을 막 무시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무시하던 때도 어머니는 저를 사랑하셨고 그래서
어머니 사랑을 믿는 데서부터 힘 받았지만 우리는 지금
어머니 사랑만큼이라도 하느님 사랑을 믿고 두려워할까요?
저는 지금 하느님 사랑을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
저 때문에 잃을까 두려워하고 있는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