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로마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 유명한 말을 합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였다.”
저는 이 말을 아주 많이 사랑하여 자주 이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런데 희망이 없어도 희망한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뜻입니까?
말이 되는 말입니까?
여기서 앞의 희망과 뒤의 희망이 다른 것은 분명합니다.
‘희망이 없어도’에서의 희망은 밖의 희망이고 미래 희망입니다.
이에 비해 ‘희망하였다’에서의 희망은 내 안의 희망이고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희망이며 끊이지 않고 지속되는 희망입니다.
그러니까 바깥의 상황을 보면 지금 내가 희망하는 것이 미래에
실현될 가능성이 없어도 지금 내 안에는 희망이 여전히 있는데
그것은 지금 내 안에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희망과 이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막연한 희망이고 근거 없는 자신감에 불과한 것입니까?
우리는 막연한 희망과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스스로를 속이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어떻게 잘 되겠지’라는 말이 대표적인데
이 막연한 희망이라도 없으면 자신이 완전히 무너지기에
이 막연한 희망이라도 붙잡고 근근이 자신을 지탱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을 했고 그래서 잘 알고 있는 것이
이런 희망과 믿음으로는 계속 버틸 수 없고
끝까지 갈 수는 더더욱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는 희망은
세상이 주는 희망이나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오는 확실한 희망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과 희망이 누구에게나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고 그래서 아브라함이 우리 믿음과 희망의
모범이 되는 것인데 어떻게 하면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과 희망을 갖게 될 수 있을까, 결국 이것이 관건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겉은 믿음과 희망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이기에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고 다른 무엇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주고 인간이 주는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고
막연한 희망도 마침내 바닥이 났을 때
이때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이 솟아오르는 것이며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희망이 없을 때 역설적으로 희망을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옛날 등화관제 훈련이 있을 때 우리는 서울 하늘의 별을 볼 수 있었지요.
인간이 만든 불과 전광판이 휘황찬란할 때는 서울 하늘에는
별이 없는 것 같았는데 그 불들이 모두 꺼지자
그제야 우리는 비로소 하늘을 보고 거기에 별이 있음을 보게 되었잖아요?
의사들이 모두 ‘희망이 없습니다.’고 할 때,
그러니까 이 의사 저 의사 다 찾아갔지만 모두가 희망 없다고 할 때
우리는 다른 희망을 찾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때도 어떤 사람은 하느님을 믿고 희망에게서 희망을 찾지 않고
인간이 고칠 수 없다면 자연이 치료해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산속으로 간다든지 자연 치료법을 쓴다든지 하는데
신앙인은 이때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고
하느님께 모든 희망을 두는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이때의 희망은 선택입니다.
하느님을 믿어보는 것이고 하느님께 희망을 걸어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하느님으로 인한 희망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되고 오늘이 되며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