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평화롭게 지내지만 같지는 않다는 뜻이고,
평화를 위해 같아져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뒤집으면
성격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의견도 다르고,
종교도 다르고,
영성도 다르고,
그야말로 많은 면에서 달라도 평화롭게 지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평화롭지만 같지 않고, 다르지만 평화로울 수 있기 위해서
전 단계가 있고, 이런 단계들을 거쳐야 합니다.
다름과 화해和解하는 단계와,
다름과 조화調和를 이루는 단계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단계를 거쳐야 다른 것과도 평화로워지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종종 다르다는 것 때문에 싸우고,
다르다는 것 때문에 사랑을 포기하고, 사랑을 포기함으로써
불화와 갈등을 해결하려는 의지마저 포기하기 쉬운데 그러지 않고,
너와 다른 내가 존중받고 싶듯이 나와 다른 너를 사랑으로 존중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처럼 그저 다른 것일 뿐이라면 우리는 평화로우면서도 다르고,
다르더라도 평화로울 수 있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어떤 사람이 또는 어떤 무엇이 그저 다른 것이 아니고
틀린 것이거나 옳지 않는 것일 경우에도 평화로워서는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진리와 정의 안에서 평화로운 것이어야지
거짓과 불의와도 평화로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의 요지입니다.
우리는 종종 ‘좋은 것이 좋지’라고 생각하고
거짓과 불의를 거슬러 싸우는 의지를 꺾거나 접습니다.
싸우는 것이 귀찮고, 버겁고, 힘들고, 괴롭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내게 불이익이 닥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정의,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를 위해
내가 힘들고, 고통당하고, 손해 볼 필요가 뭐 있어 하며
세상의 거짓과 불의와 적당히 타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과 불의와 싸우지 않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의 안위와 평안을 위해 비겁하게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힘과 사랑의 힘이 내게 부족하기에 싸우지 않는 겁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내게도 거짓과 불의가 있기 때문이고,
그것을 고치려는 회개의 의지가 약하기 때문이며,
나와 공동체를 하느님 뜻에 맞게 고치려는
더 큰 사랑과 진정한 사랑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하시며
우리의 이 약한 사랑의 불이 당신이 지르시는 불로
활활 타올랐으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사실 하느님 사랑이 불을 붙이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타오겠습니까?
그래서 클라라 성녀는 이렇게 노래하지요.
“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에 불을 붙입니다.
님에 대한 관상은 우리의 휴식이고, 님의 어지심은 우리의 만족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불을 붙여도 붙지 않고
열을 가해도 뜨거워지지 않는 그런 불연 존재가 아니라
가연성可燃性의 존재들, 곧 불을 지르면 불이 붙는 존재여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