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제 저녁 기도 때 묵상을 하다가 문득 ‘내일저녁부터 대림절이 시작되지’
하는 생각이 들더니 이내 옛날 제가 애창하던 노래, 그러나
30년도 더 부르지 않던 노래가 생각나고 입에서 가사가 맴 돌았습니다.
<기다리는 마음>이라는 노래인데 노래 가사와
기다림의 시기인 대림절과 맞아떨어져 저절로 그 노래가 생각난 것입니다.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빨래소리 물레소리에 눈물 납니다.’
이런 가사인데 이 노래를 생각다가 또 다른 애창곡이 생각났지요.
‘바다 물결 춤추고 갈매기 때 넘나들던 곳. 내 고향집 오막살이가 황혼 빛에
물들어가네. 어머니는 된장국 끓여 밥상 위에 올려놓고 고기 잡는 아버지를
밤새워 기다리신다.’는 내용인데 공통점은 둘 다 매우 서정적이고,
그 서정성이 <그리움>과 <기다림>이라는 점이어서 흥미로웠습니다.
그때는 나에게도 이런 서정이 있었나보다 생각이 들고,
지금도 이런 서정, 곧 그리움과 기다림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랬을 겁니다.
그때는 막연하게 <님>이 있었습니다.
아니,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바람이 있었을 겁니다.
그리워 할 <님>이 있고,
사랑하는 <님>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는데
실은 그것이 곧 사랑이었고, 사랑하고 싶었던 거지요.
그런데 지금 그런 <님>이 있는가?
그립고, 보고 싶고, 그래서 기다리는 그런 <님>이 있는가?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막연한 <님>은 없고 확실한 <님>은 있습니다.
이미 와계신 <님>은 있고 기다릴 <님>은 없습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그 <님>은 <주님>이고,
옛날에는 그 <님>이 막연했지만 지금은 그 <님>이 확실한 이유도
옛날에는 사랑스런 여인인 것도 같고 하느님인 것 같기도 했는데
이제는 확실하게 <님>은 <주님 하느님>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와계신 <님>은 있는데 기다릴 <님>이 없다는 겁니다.
이 대림절에 교회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라고 하니.
이미 와 계시고 함께 계시는 주님인데 뭘 기다리나 하는 생각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사랑이 참 사랑이고 식지 않는 사랑,
아직도 불타고 있는 사랑이라면 봐도 또 보고 싶고,
함께 있어도 그립고, 보고 싶고, 기다리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흡족이면서 갈증입니다.
사랑은 흡족하면서도 갈증 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사랑으로 흡족하면서도 갈증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함께 있다고 갈증이 없는 것은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고
사랑하고 또 새롭게 불태우는 그런 사랑이 아니며
한 번 군불 땐 것으로 유지하는 그러나 언젠가 식어버리는 과거 사랑입니다.
저는 <과거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새롭게 다시 시작하지 않는 사랑은 과거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훌륭한 온돌이라도
매일 다시 불을 때지 않으면 언젠가는 식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늘 사랑을 새롭게 하여 함께 계셔도 또 기다릴 수 있도록
이 대림절에 사랑의 타성을 늘 경계하며 늘 깨어 기도해야겠습니다.
늘 뭔가 조잘대며 속삮이게하는 마음 나
눔...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더 사랑하고파 목이 마르는 갈증과 같은 애닮음...
사랑받고 있는 줄 알면서도 더 사랑받고 싶어하는 애태움...
언젠가 그 님의 품에 안기리라는 기다림...
.
.
.
깨어 기다리다가 맞이하리라...
나만의 님을...
모두의 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