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에서 “Truth”라는 말은 우리말로 두 가지로 번역됩니다.
진실/사실과 진리라는 뜻 두 가지입니다.
그리고 오늘 요한의 편지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감히 이렇게 얘기합니다.
진실이 없으면 진리도 없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그에게 진실이 없다면 그에게는 진리도 없다.
이는 위선僞善에는 선이 없다는 것과 같은 맥락인데
그러므로 아무리 선으로 위장僞裝을 해도
선이 없음이 탄로가 날 것이고 위선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위선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은
선이 없음이 탄로가 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설사 탄로가 나지 않더라도 행복하지 않다는 얘기이고,
선이 없다는 것 그 자체로 불행하다는 얘기입니다.
사실 선이 없으면서도 위선을 하는 것은
선이 없음으로 인해 불행하기 때문이고
그래서 위선으로라도 행복하려고 발버둥치는 것인데
이런 발버둥을 거칠게 표현하면 불행한 사람의 헛지랄입니다.
이것을 축구로 치면 공을 찬다고 찼는데 헛발질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공을 차는 법을 아무리 이론적으로 잘 알아도
실제로 찰 때 헛발질하면 아무 소용이 없듯이
위선으로 행복하려는 것은 소용없는 짓입니다.
거짓말쟁이에게는 진리가 없다는 요한의 말은
거짓이나 거짓말로는 행복할 리가 없다는 말이고,
행복할 리가 없다는 것은 행복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말의 ‘그럴 리가 없다’에서 ‘리’란 제 생각에
한자어의 리理로서 이치 또는 까닭이라는 뜻이며
거짓에는 행복의 참 이치(진리)가 없기에 행복할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우리에게 거짓이 있을 수 있음을 요한은 지적합니다.
하느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그분의 말씀/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은
그 아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거짓으로 아는 거라는 얘깁니다.
요한의 편지에서 안다는 것, 특히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사랑하지 않으면 진실로/참으로/정말로/진짜로 아는 것이 아니며,
그런 앎은 거짓 앎이며 안다고 한 말도 정말/참말이 아니고 거짓말입니다.
사실 우리의 앎은 많은 경우 머리로 아는 것이지 사랑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아는 것이 아니기에
하느님이 머리에만 있고 실천에는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으로 알지 않고 머리로만 알 경우
하느님은 알아도 하느님이 뭘 원하시는지는 알려하지 않아 모를 것이고,
혹 하느님의 원의를 안다하여도 그것을 실천할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의지가 없는 앎,
실천의 의지가 없는 앎,
원의를 알아도 실천의 의지가 없는 앎은
사랑의 앎이 아니고 하느님을 진실로 아는 것이 아니며
진실이 없으면 진리도 없기에 그런 앎으로는 행복해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요한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겠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날씨가 점차 추워지는군요
건강한 나날의 작은형제회 삶을 잘 사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