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에서 박사들이 별의 인도로 예수님을 찾아 옵니다.
박사들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십니다.
이렇게 시작한 드러냄은
세례를 통해서
그리고 기적과 표징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는 것으로 발전되어 갑니다.
그것을 오늘 성무일도 아침 기도의 즈가리야의 노래 후렴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오늘 그리스도께서 요르단강에서 죄를 씻어 주시니,
교회는 천상 신랑과 결합하였도다.
박사들이 예물을 가지고 임금님의 혼인 잔치에 달려오고,
물이 술로 변하여 잔치 손님들이 기뻐하였도다.'
모세 이후로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옛 선조들은 하느님과 친구처럼 대화했지만,
모세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사람들은
하느님을 볼 수 없고,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본다는 것,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이 가장 큰 영광이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갈망해 왔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점점 더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지기만 합니다.
하지만 육화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 오셨고,
오늘 박사들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끊임없이 당신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십니다.
요한복음은
카나의 혼인잔치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물이 포도주로 바뀐 표징을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공적으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사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 사건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표징을
요한복음사가는 항상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신 것과 믿음은
항상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뿐만 아니라 모든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지만,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 이들에게는
예수는 그저 한갖 인간일 뿐
메시아로, 구원자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기적은 그저 기적일 뿐,
기적을 일으킨 주체, 그분이 메시아라는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게 되고
부활 이후에도 예수의 시체를 제자들이 훔쳐 갔다는 식으로
거짓 소문을 퍼트리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면서
당신을 드러내려고 하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당신께로 부르시려고 하십니다.
하지만 믿음의 눈이 없이는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그분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미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그저 빵으로 받아 먹을 뿐
그리스도의 몸으로 받아 모실 수 없습니다.
삶의 순간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그분을 느끼면서
우리의 믿음을 조금씩 더 키워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커가는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그분을 조금 더 명확하게 알아보고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오늘 본기도에게 기도하는 것처럼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직접 뵈옵는
영광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