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오늘 복음과 같은 말씀을 접하면 저는 은근히 화가 치솟습니다.
제 성향性向이라 할 수도 있고 지향志向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해야 할 것을 생각해야지 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생각하는지,
답답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까지 하는 겁니다.
저의 생각은 이런 것이지요.
그래 그렇게 할 것이 없어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생각하나?
저는 지나간 것을 잘 기억치 못합니다.
머리가 나빠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주요인은
지나간 것을 제가 금방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지나간 것을 금방 잊어버리는 이유가
바로 저는 벌써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에 도착하면 벌써 떠날 생각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나쁘게 얘기하면 조급증으로 진득하니 머물지 못하는 거라고 할 수 있지만
좋게 얘기하면 저는 어디에 안주하지 않는 것이고, 더 좋게 얘기하면
넘치는 에너지로 또 다른 열정의 순례, 사랑의 순례를 하는 겁니다.
같은 맥락에서 저는 ‘미워하지 말아야지’ 하기보다 ‘사랑해야지’ 하고
저도 어떤 때는 누가 미워서 미워하지 말아야지 하다가
즉시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어 사랑해야지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해야 할 것, 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다가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수없이 저지르는 저를 생각하며
겸손의 차원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성찰하려고 합니다.
사랑해야 할 제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미워하지 말아야 하지만
미워하는 것보다 제가 더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욕심 부리지 않는 겁니다.
왜냐 하면 제가 사랑을 하는 것을 가장 망치게 하는 것이 바로 욕심이고,
욕심 중에서도 사람에 대한 욕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물질에 대한 욕심은 사람에 대한 욕심에 비할 때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에 대한 욕심이 너무 많아서 늘 좋은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좋은 물건이 나와도 새로운 제품이 나와도 저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에 대해서는 좋은 사람이기를 바라고,
그것이 또 얼마나 집요하냐면 이젠 좋은 사람이기를 포기할 만도 한데
끈질기게 그가 좋은 사람이기를 바라고 나아가서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늘 성찰하기를 사랑을 하려면
그의 아픔을 봐야지 그의 선을 보려고 하면 안 되지요.
또 이렇게도 얘기해야겠습니다.
이미 있는 그의 선을 봐야지 없는 선이 있기를 바라면서 봐서는 안 되지요.
갓난아기는 욕심으로 보지 않기에 그저 사랑스럽지만
그 아이가 조금만 커도 부모의 욕심이 들어가면 불만스럽고,
불만스럽기에 갖가지 요구를 해댑니다.
그러니 그 욕심과 요구를 채울 수 없는 그의 한계와 고통은 보이지 않고,
채워주지 않는다고 생각이 되어 그런 그가 괘씸하고 화가 나고 밉습니다.
그러나 욕심 부리는 것보다 제가 더 하지 말아야 할 것은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겸손이 만덕의 기초이니 교만은 만덕을 허무는 것일 진데
제게는 욕심보다도 교만이 더 큰 문제이기에 교만을 더 경계해야 하지요.
그런데 제 경험상 욕심은 제가 좀 경계하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지만
교만은 하느님이 저를 깨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극복불가능입니다.
깨지는 것은 싫은데 그러기에 깨주시기를 바라야 하는 저의 역설입니다.
어쩌면 바리사이들이 저와 같기 때문에 오늘 주님께 깨지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