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게 되었다.”
시기와 질투는 분명 아주 나쁜 것이고 그래서 다윗을 시기한 사울이
잘 했다고 우리는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긴 하지만 그리고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지만 저는 사울을
너무 나무랄 수 없고 더 나아가서 왠지 이해하고 싶고 이해도 됩니다.
적어도 콩쥐팥쥐의 그 팥쥐같은 존재는 아니라는 뜻이고,
사실 사울은 꽤나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면 아들 요나탄이 사울에게 “임금님, 임금님의 신하 다윗에게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임금님께 죄를 지은 적이 없고,
주님께서는 온 이스라엘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라고 충고하자
그 충고를 받아들일 정도는 되니 말입니다.
사울과 다윗의 얘기 전체를 잘 뜯어보면 그리고 오늘 얘기를 보면
사울이 시기를 안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오늘 사무엘기는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는데
제가 봤을 때는 시기뿐 아니라 질투까지 섞여있습니다.
하필이면 다윗을 사울과 비교하여 칭송하는 것이 여자들입니다.
남자들이 다윗을 치켜세웠으면 시기만 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리고 사무엘기를 보면 “사울은 주님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며
자기에게서 돌아서셨기 때문에 다윗을 두려워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을 보면 하느님도 자기보다 다윗을 더 사랑하는 것으로
사울은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기는 누가 나보다 뭘 잘 하거나 잘 될 때 생기는 악감정이고,
질투는 누가 나보다 더 사랑 받을 때 생기는 악감정인데
다윗이 자기보다 성공할 뿐 아니라 사람들 그것도 여자들로부터
더 사랑받고 하느님에게서도 더 사랑받는다는 생각이 드니
시기에 질투까지 더 하여 사울이 주체할 수 없었던 겁니다.
우리가 신앙이 깊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인간적으로만 머물면
시기에 질투까지 하게 되면 아무리 마음을 다스리려 해도 작동불능입니다.
사울도 아들 요나탄의 말을 듣고 한 때 마음을 돌렸지만 이내
다시 시기와 질투의 불이 타오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도 요나탄이 한 말의 경지에 올라야
시기질투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가 한 말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무리 사람들이 다윗을 칭송하고 여자들이 칭송을 해도
마치 유혹을 당하듯 거기에 마음이 걸려 넘어져서는 안 됩니다.
승리한 것은 다윗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요나탄은 분명히 주님께서 승리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주님께서 그 승리를 다윗 개인에게 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그러니까 공동체에 주신 거라는 점입니다.
요나탄은 분명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온 이스라엘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승리는 주님의 승리이고 공동선을 위해서 주신 겁니다.
우리는 모든 선을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고
한 사람의 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선을 위한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누구든지 주님께서 자기 형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보고
그 형제를 시기하면, 모든 선을 말씀하시고 이루어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
자신을 시기하는 것이기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모든 선은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
하느님은 편애를 하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
하느님은 선을 공동선을 위해 주신다는 것, 이 모든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부터 믿지 못하는 저를 반성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