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목 : 노숙자 예수 Jesus the Homeless(2013)
* 작 가 : 티모테오 슈말츠 Timothy P. Schmalz(1969- )
* 재료 크기 : 청동 : 215cm, X 92cm, X72cm
* 소재지 : 미국 시카고 대교구 카리타스 사무실 앞
프란치스코 교황의 취임 1주년이 되는 어느 날, 교회에 대한 문제점을 자주 들추시며, 교회에 대한 시선이 그리 곱지 않던 이태리 어떤 언론 매체가 탑 기사로 “ 성 프란치스코가 흰옷을 입고 로마에 나타났다.” 라는 제목으로 교황님을 소개 했다. 그동안 교회의 적폐를 고발하는데, 큰 사명감을 느끼던 언론의 표제로서는 좀 예외적인 표현이긴 하나, 프란치스코 교황의 진면모를 너무도 정확히 꿰뚫어 표현한 것이다.
2013년 교황으로 취임 되신 후, 곧 이태리 남단 시칠리아의 람페두사(Lampedusa)에 있는 북 아프리카에서 생명을 걸고, 탈출한 난민들이 수용되어 있는 시설을 방문하셔서 수용된 난민들을 위로하셨다. 이 난민들은 가톨릭 신자가 아닌 대부분 모슬렘들이었으나, 교황님의 눈엔 이들은 살기 위해 고향을 탈출해서 크리스챤 지역으로 온 형제로 여기기에 이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함께 이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는 크리스챤 국가들의 비(非)정성을 극렬히 고발하셨다.
한 종교의 지도자이기 이전 인류의 행복을 책임지는 것이 교황의 사명으로 여기며 행동하시는 이런 태도는 많은 정치인들을 깨우쳐 유럽으로 들어오는 이주민들이 인간다운 대접을 받는 계기로 만들었으며, 그 후 이어진 시리아 내전으로 생긴 난민들을 유럽 크리스챤 국가들이 받아들이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하셨다.
교황님의 이러한 모습은 , 현 시대에 맞은 성 프란치스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기에 평소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표출하던 그 언론이 칭찬한 것이다.
교황님은 무슨 새로운 신조를 만들어 교회의 기강을 확립하지 않으시고, 복음의 실천을 이론적 차원이 아닌, 밑바닥 인생들의 삶을 바라보게 만듦으로서 세상이 바뀌는 모습으로 전하고 계신다.
이런 교황님의 관심에 걸맞은 작품이 어떤 작가에 의해 제작되면서, 조용하면서도 힘찬 감동을 일으키고 있다.
작가는 캐나다 출신으로 온타리오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 후, 여러 작품을 남겼으나, 그가 남긴 많은 기념비와 기념탑과는 달리 이 조그만 작품이 여러 곳에 설치되면서 교황님이 세상에 주신 따뜻한 감동을 전하고 있다.
이 작품은 유럽 뿐 아니라, 세계 어느 대도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겨울 노숙자의 모습이다. 겨울은 가난한 사람을 더욱 위축되게 만드는 비참한 지옥의 시작이다. 추위를 피할 곳을 찾지 못한 노숙자는 이 작품의 모습으로 을씨년스러운 밤을 보내고, 해가 뜨면 공공시설이나 하다못해 지하철을 탑승하면서 고달픈 인생을 살아야 한다.
작가는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으나 너무 비참해서 눈길을 돌리고 싶은 현대인들에게 교황님처럼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하는 교육적 의도로 이 작품을 제작했다. 작가는 이 작품이 주는 메시지를 마태복음 25장 34절부터 40절까지의 말씀, 그 중에 40절의 말씀에 두었다.
“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다.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자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따뜻이 맞아 들였다. …… 또 내가 헐벗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는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해 맞아 들였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 (마태 25, 34 - 40)
교회 전례는 이 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장례미사의 복음으로 사용하고 있다.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장례식에 참석한 신자들이 언젠가 자기도 죽어야 할 존재임을 확인하는 순간, 들어야 하는 복음으로 제시하고 있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오 25, 40)
대도시 공공장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벤치에 추위를 한껏 피하기 위해 온몸을 담요로 둘러싼 노숙자가 누워 있다. 그의 신분이 어떤 사람인지, 젊은이인지, 노인인지도 전혀 드러나지 않는 그런 모습이다.
한마디로 익명의 모습으로 노출된 노숙자의 모습이다. 이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기에 자신과 무관한 어떤 존재로 여겨 외면할 수 있다. 한편, 벤치에 앉아 안락을 누리고 싶은 이들에게는 자리를 점거한 그리 반갑지 않는 존재이다. 그래서 때때로 누군가에 의해 치워지길 바라는 그런 존재가 된다.
작가는 바로 이 존재가 예수님임을 알리고 있다.
크리스챤들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찾기 이전 이런 노숙자의 모습에서 예수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즉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이 여기며 무관심하거나, 피하고픈 노숙자가 바로 예수라는 것을 알리고 있다. 그가 예수이던, 혹은 예수를 닮은 사람이던 상관없이, 이 노숙자의 모습이야 말로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에 대한 기억을 일깨우는 것임을 알리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기억의 종교이기에, 성찬례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라 ”는 기억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작가는 바로 겨울철 길거리에서 흔히 만나는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이 키워야 할 기억을 일깨워주고 있다. 성체성사를 축성하는 전례의 가장 중요한 순간은 현실과 유리된 어떤 초월의 시간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이 평범한 장면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억을 일깨울 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선사하고 있다.
벤치에서 땅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선 몸을 한껏 펴고 있는 이 노숙자의 발치엔 한 사람이 앉을 만한 작은 공간이 있다. 몸을 웅크려야 추위를 피하기 쉬운데, 이 노숙자에겐 그런 선택의 권리도 없이 밤을 지새워야 하는 비참한 현실이 남긴 공간이다.
그의 드러난 발목엔 못 자국이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생긴 못 자국이란 것을 보아 이 노숙자라는 예수라는 것을 공감할 수 있다. 그가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이던, 생존경쟁에서 낙오되어 노숙자가 된 사람이던, 상관없이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에 대한 정확한 기억을 일깨워야 한다는 것을 작가는 강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 작품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일깨워야 할 복음의 중요한 기억을 알려 주기에 세계 여러 도시에 이 작품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마치 우리나라 곳곳에 세워진 위안부 상처럼 어떤 때 비난이나 거부의 표적이 되면서도 세워지고 있다.
이 작품은 2016년 교황청에 있는 성 에디지오 공동체라는 빈민식당 앞에 세워지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고, 스페인의 마드리드, 아일랜드의 더블린, 싱가포르, 도미니카, 캐나다의 밴쿠버, 미국 중북부 노스다코타, 노스캐롤라이나 등 … 세계 각지에 설치되어 세인들의 관심을 사로잡고 있다.
곧 그리스도인들은 사순절을 시작하게 된다. 가톨릭 신자들에 있어 사순절은 특별한 신앙쇄신의 시기이다. 그러기에 단식, 특별기도, 절제, 극기를 통해 자신을 정화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의 한계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순절의 수행을 통해 신앙의 핵심에 이르지 못하고 언저리를 반복하는 것으로 끝내는 안타까운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매일 십자가의 길을 바치면서도, 하나의 기도행사로 끝나며 삶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모습들이다. 일명 언행불일치가 되는 모습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이러한 현실에서 이 작품은 우리 신앙의 핵심은 현실 삶에서 실천을 통해 표현되어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를 주고 있다. 매일 길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는 행인들의 모습 안에 예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과 이런 사람들 안에 있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리스도인들 삶의 향기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작가는 관객들에게 노숙자의 발치에 있는 빈자리에 앉아, 목 박힌 흔적을 응시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건강한 기억을 키울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근래 우리 교회는 성직자들의 비행으로 시작해서 참으로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들이 언론을 통해 고발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있기에 거룩하지만, 여기에 몸담고 있는 신자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죄 많은 인간이기에 약한 인간이 보이는 허약성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수준 있는 신앙을 살고픈 사람들에게 안타까움과 실망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가 제시한 예수님을 삶의 현장에서 만나 예수님으로 대접하는 그리스도인들의 행렬이 계속 이어지기에 거룩한 교회의 향기로운 모습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명망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프란치스칸 사제가 되어 일생을 노숙자를 포함한 빈민들을 위해 헌신해서 프랑스의 노숙자들의 위상을 복음적으로 바꾼 피에르 신부(Abbe Pierre : 1912- 2007)가 있다. 그는 복음에 대한 깊고 정확한 사색을 행동으로 표현하고자 했기에 평생을 반골 기질을 드러내며 살았다.
“ 사제이면서도 신앙인에게는 정의가 사랑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으며, 교회 안 밖의 위선적이거나, 복음의 알맹이는 표현 못하는 형식적인 것을 보면 강하게 질책했다. 그가 노숙자들의 숙소 마련에 혼신을 다할 때 성당을 짓는 것 보다 추위에 떨고 있는 노숙자들을 위한 주택을 짓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파격적인 발언도 서슴없이 하셨다. ”
그의 이런 태도는형식적 전례의 강조와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신조나 법으로 무장된 교회에 실망을 느껴 떠난 많은 사람들에게 교회를 다시 보게 만드는 극적인 촉매제가 되었다.
그는 생전 여러 해 동안 프랑스의 미래에 희망을 줄 수 있는 10명의 인사 중 하나로 계속 뽑히게 되었다.
이 작품은 프란치스코 교종이 행동으로 보이고 있는 현대 교회가 강조해야 할 크리스챤 삶의 진면모를 제시했다는 면에서
대단한 예언성을 띈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