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고,
또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어제의 야고보서는 시험과 시련에 대해서 얘기했고
오늘의 야고보서는 유혹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제 생각에 어떤 연관성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 유혹에는 두 가지 유혹이 있습니다.
<욕망의 유혹>과 <시련의 유혹>입니다.
보통은 유혹을 얘기할 때 욕망의 유혹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래서 오늘 야고보서도 뒷부분에서 하느님이 유혹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욕망 때문에 유혹을 받는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술을 먹고 싶은 사람이 옆에서 술 먹자고 하면 유혹에 넘어가고,
성적인 욕망이 펄펄 들끓는 사람이 예쁜 여자를 보면,
아니 예쁜 여자가 아니어도 여자만 보면 유혹에 넘어가고,
그래서 요즘 너무도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성폭력도 하는 겁니다.
반대로 술이 싫거나 술 먹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은
술친구가 아예 없을 것이고 누가 술 먹자고 해도
그것이 유혹이 되지 않기에 유혹 때문에 먹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성적인 유혹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러니 자기욕망이 유혹의 원인이라는 말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혹에는 욕망의 유혹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련의 유혹도 있습니다.
어제 야고보서에서 시련을 당할 때 인내심이 생긴다고, 다시 말해서
인내심 단련의 좋은 기회이니 좋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얘기했지만
시련은 단련의 계기도 되지만 유혹의 계기도 되지요.
우리가 시련을 받을 때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고,
다른 신을 믿어볼까, 점이라도 쳐볼까 유혹을 받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하느님은 우리를 유혹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믿음의 단련을 위해 아들 이사악을 바치라는 시련을 하느님께서 주실 때
아브라함에게 전혀 유혹이 없었을까요?
누가 유혹하지 않았어도 그 안에서 배신의 유혹이 엄청났을 겁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유혹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주님마저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 악마의 유혹을 받게 하셨는데
그런데도 하느님이 유혹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오늘 야고보서는 그럴지라도 유혹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은 것처럼 유혹을 받게는 하셨어도
당신이 직접 유혹을 하신 분은 아니라는 뜻이지요.
유혹자란 죄를 짓게 꼬드기는 존재인데
앞서 봤듯이 하느님은 죄를 짓게 하기 위해 시련을 주신 것도 아니고,
죄를 지으라고 욕망을 주신 것이 아니기에 유혹을 받게는 하셨어도
유혹하시는 분은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시련을 통해 우리를 단련시키시고 성장하게 하심이고,
유혹을 통해 우리가 욕망이 아니라 사랑을 선택케 하시고
우리의 사랑이 더 뜨겁고 간절하게 하시기 위함이지요.
그러니 시험이니 시련이니 유혹이 우리에게 닥치면
죄의 기회가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하느님 손에서 나올 때는
다 우리 믿음의 단련과 사랑의 성장을 위한 히든카드Hidden Card,
다시 말해서 사랑과 은총이 그 안에 숨어있는 패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