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나는 당연히 그가 나에게 나와 서서,
병든 곳 위에 손을 흔들어 이 나병을 고쳐 주려니 생각하였다.
다마스쿠스의 강들은 이스라엘의 어떤 물보다 더 좋지 않으냐?
그렇다면 거기에서 씻어도 깨끗해질 수 있지 않겠느냐?”
물로 씻은 것이 아니라 은총으로 씻은 것이고,
사람이 치유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치유한 것이며,
인간의 공로로 치유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로 치유된 것이다.
그리고 나아만은 육신이 치유된 것이 아니라 영혼이 치유된 것이다.
이것이 제가 오늘 묵상한 내용의 결론입니다.
시리아 장수 나아만은 엘리사의 말대로 요르단 강 물에 씻었더니
나병이 다 나았습니다.
그런데 물로 씻어 낫는 것이라면 나아만의 말대로
다마스쿠스 강들의 물이 더 좋은 물이고 그러기에
굳이 그 쫄쫄쫄 흐르는 요르단 강물에 씻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씻는 것이 물이 아니라 은총으로 씻는 것이라는 말은
물로 씻는 것이 아님은 물론 사람이 씻어주는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나아만이 씻을 때 엘리사는 나와보지도 씻어주지도 않았습니다.
이에 나아만은 엘리사가 교만하다고 또는
시리아의 유명한 장수인 자신을 무시했다고 분노합니다.
신앙이 없이 보면 다시 말해서 인간적인 관계와 그런 눈으로만 보면
나아만처럼 볼 수밖에 없고 그렇게 보는 것이 정상입니다.
나아만은 자기가 가져온 수많은 예물이면
엘리사가 만족을 하고 성의를 다하고 정성을 다해 기도를 하던지
어떤 치유의 행위를 해야지만 치유가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얘기를 놓고 보면
인간의 정성이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가 치유하는 것이고,
인간의 정성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인간의 마땅한 예의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하느님의 의지에 치유가 달려있고,
하느님의 힘에 치유가 달려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라 이방인을 치유해주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민인 자기들이 치유되는 것은 마땅하고 당연하지만
이방인은 치유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였는데,
그런 인간적인 요소는 치유의 조건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무튼 병의 치유를 통해서 나아만에게 일어난 것이 무엇입니까?
몸의 병이 낫게 된 것만이 아닙니다.
병이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난 것이고
하느님을 만남으로써 영혼까지 치유된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이 발생하지 않고 그래서 육신의 병만 낫는 것은
하느님께서 치유하신 것이 아니라 의사가 고쳐준 것에 불과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육신의 병은 의사의 정성과 힘만으로도 가능하지만
영혼의 구원은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만 가능함을 다시 한 번
묵상하는 오늘이 되고 그런 구원이 일어나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아직도 "영혼"이라는 말이 낯설은 저에게
영원의 구원을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의 바다속에 헤엄치는 삶이 되기를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