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용서는 참으로 쉽지 않고,
그래서 아예 용서를 하려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용서하려고 하지만 용서가 되지 않아서 괴로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무척 애를 써서 가까스로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안 보일 때는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눈에 띄니, 또는
같은 짓을 또 보니 용서가 안 되어 괴로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용서는 왜 쉽지 않고
용서는 왜 번번이 실패할까요?
말장난 같은데 오늘 복음의 베드로처럼 번수를 따지기 때문입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한 번만 용서하려는 사람은 그 한 번 용서하기도 어렵지만
설사 한 번 용서하였다 해도 그 다음 두 번, 세 번부터는
용서할 의지도 능력도 마음도 없기에 번번이 실패하겠지요.
용서하려면 용서하려는 의지가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지만 가지고 되지 않고 용서할 능력도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용서할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용서하려는 마음 옆에는
용서하기 싫은 마음이 항상 있습니다.
용서하려는 마음이 의지적인 마음이라면
용서하기 싫은 마음은 감성적인 마음입니다.
의지라는 것이 많은 경우 싫은데도 하려는 것입니다.
용서도 감정이나 감성적으로는 하기 싫은데
머리로는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의지적으로 용서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용서뿐 아니라 무엇을 하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서 하지 못함은
하기 싫은 마음과 하려는 마음이 같이 있기 때문이듯
이렇게 마음이 용서하기 싫은 마음과
용서하려는 마음으로 갈리면 마음을 다해 용서가 되지 않고,
마음을 다하지 못할 때 용서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지 않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혹 한 번 했어도 다음에는 번번이 실패하는 겁니다.
그러면 언제 마음이 갈린 마음이 아니고 온 마음이 되며,
그래서 마음으로부터 용서건 무엇이건 하게 될까요?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일 때라고 오늘 독서는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
저희를 숫양과 황소의 번제물로 받아 주소서.”
그렇습니다. 아자르와 청년들처럼 이제 모든 것을 다 잃고
목숨마저 잃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태에 이르러
가난의 한 가운데 있게 되고 고통의 한 가운데 있게 되면
하기 싫은 마음은 없어지고 해야 할 것을 하려는 한 마음만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 되면 오늘 아자르와 청년들처럼 이렇게 얘기를 할 겁니다.
“저희는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따르렵니다.”
그러나 더 완전한 것은 역시 사랑이 충만할 때입니다.
사랑이 충만하면 우리 마음은 한 번이 아니라 천 번까지
횟수를 따지지 않고 용서할 채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한 마음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소망해보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