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주님을 알자는 호세아 예언자의 말의 뜻이 뭘까,
오늘은 그것을 묵상해봤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복음과 더불어 묵상을 하니 즉시
자기만 알고 주님은 모르는 것이 연상이 되었습니다.
자기만 안다는 것은 자기밖에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얘기지요.
그런데 우리말 <자기 밖에는>을 잘 분석해봅시다.
이 말에는 <자기 안>과 <자기 밖>이 있는데
<자기 밖에는> 없다거나 모른다는 것은
자기 바깥에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자기 바깥에는 누가 있는지, 어떤 존재가 있는지 모른다는 얘기지요.
자기 밖에도 분명 사람이 존재하고 하느님이 계시는데도
자기 밖에는 모르기에 있어도 없는 것이고, 없기에 알지도 못합니다.
이것은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가 보이는 교만의 현상인데
그러므로 주님을 알자는 것은 겸손해지자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어제 복음에서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다고 칭찬을 받은
바리사이는 구약을 인용하여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밖에 다른 이가 없다.”
이렇게 사랑의 존재가 되면 교만과 정 반대가 되고
특히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밖에는 없게 됩니다.
다음으로 주님을 알자는 말의 뜻은 그저 존재를 아는 것에서 더 나아가
지금 아는 것으로는 부족함을 인정하고 더 알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알자고 한 다음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고 호소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더 알아야 합니까?
하느님이라는 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넘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합니다.
광주에 가면 누가 있다더라 하는 정도만 알면, 아는 것이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 아는 것은 더더욱 아니듯
하느님도 계시는 것 정도로만 알고 그것도 우리와 상관없이
하늘에 계시는 분이라고 아는 것은 사랑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애써 아는 것은 사랑으로 아는 것이 깊어져서, 다시 말해서 사랑하기에
알고 싶고 또 알고 싶고 그래서 자연 알게 되고 또 알게 되다 보니
하느님은 존재자일 뿐 아니라 사랑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사랑이시기에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까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의 깊이를 안다면 너무도 행복할 텐데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만큼 하느님 사랑의 깊이를 알 것이고
어떻게 사랑하는지 그 사랑의 다양성에 감탄에 감탄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을 더 알게 되면 주님이 뭘 원하시는지 알게 됩니다.
사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다시 말해서 특별할 것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면서 사랑하는 분의 뜻을 모르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이 아니라 자기애自己愛나 자기중심에 빠질 때는 자기 뜻만 있고
상대의 뜻은 헤아리려고도 하지 않고 그래서 알지도 못하지만
사랑을 하는 순간 상대의 뜻을 귀신같이 알게 되고
사랑을 하면 할수록 알려고 애쓸 필요도 없이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느님을 다 알 수 없듯이 하느님의 뜻도 다 알 수 없지만
사랑의 이치가 그렇다는 거고 우리가 알 수 있는 최대치를 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좋겠지만 그리고 호세아의 말처럼 알도록 애써야겠지만 적어도
하느님을 몰라도 되는 그런 삶은 살지 않기로 다짐하는 오늘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