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 말고는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는
본 것이 없습니다.
물론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부분에서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만나고,
베드로와 요한도 그러하지만,
적어도 오늘 복음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빈 무덤 이야기만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묻혔던 무덤이 비어 있습니다.
이성으로 생각하기에는
마태오복음에서 나타난 것처럼,
누군가 시신을 훔쳐갔다는 것 밖에는
달리 이해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 시신을 숨겨서 어떻게 했을까요?
정말 제자들이 시신을 숨기고
예수의 부활을 이야기 했다면,
거짓이 그렇게 오래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하면서,
그분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라고 전하면서
거짓을 이야기하는 것은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시신을 누가 훔쳐갔다는 것,
혹은 숨겼다는 것밖에
머리로 빈 무덤을 이해할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왜 주님께서는 멋진 모습으로
죽음에서 부활하지 않으셨을까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보란듯이 무덤 문을 열고
걸어 나오지 않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내려오지 않으신 것과 똑같다고 생각됩니다.
사람들이 십자가 위에서 내려 와 보라고 조롱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충분히 내려오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십니다.
그것은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권능을 가지고 당신을 못 박은 이들을
벌하신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징벌의 첫 대상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고발하고,
예수님을 배신한 이들이
복수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세상을 향한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는 단 한 명도
제외되지 않습니다.
그가 비록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을지라도,
그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이렇듯 사람들 앞에서 무덤 속에서
보란 듯이 걸어 나온다는 것은
불신자들에 대한 심판이
그 안에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직접 그들을 심판하지 않으시지만,
무덤 속에서 걸어 나오는 예수님을 본다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을 배신하고 등을 돌렸던 이들에게는
커다란 충격,
자신들이 무엇인가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는
자책감을 가져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 인간의 약함을 알고 계시기에,
그 약함 마져도 사랑하시기에
부활 사건은 남몰래, 조용히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빈 무덤,
결코 믿기 쉬운 사건은 아닙니다.
하지만 무덤이 비어 있다는 그 사건은
우리를 믿음으로 초대하고,
우리가 우리의 나약함 속에서도
단죄를 받기보다는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한 사건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부활시기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주님의 사랑은
제자신이 자책감에 매몰되지 않고 한걸음이라도 걷기를 바라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