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제 생각에 아는 것에는 크게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것과 경험적으로 아는 것.
지식적으로 아는 것은 머리로 아는 것이고 그래서
머리가 좋고 흥미와 노력이 뒷받침되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무식이나 편견의 소산일지도 모르지만
상식이나 이론적인 지식은 머리로 알 수 있어도
깨달음 또는 깨달아 아는 것은 머리로만 알 수 없습니다.
왜냐면 깨달음은 진리와 진실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되었음을 말함인데
이성의 작용으로 진리와 진실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가능할 것 같지만
이성은 욕망이나 편견에 휘둘려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작용하기에
이성만으로 진리와 진실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이나 독일 사람들이 매우 이성적인 것 같지만
군국주의자나 나치의 선전선동에 집단적으로 속아 넘어가
전쟁을 일으키고 비이성적인 짓을 저지르는데 동조하였고,
우리가 흔히 그것은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이야 라고 하듯이
우리는 어떤 말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곤 합니다.
그래서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잘 알고 있는 줄 알거나
아는 것이 진실의 일부라는 것을 모르고 전부라고 알거나
자기가 알고 있는 작은 진리를 보편적인 진리라고 잘못 알거나 합니다.
그래서 깨달음의 과정은 항상 몰랐거나 잘못 알았음을 깨닫고
모르거나 잘못 알았기에 잘못 살았음을 깨닫는 것이 그 첫 번째입니다.
아, 나는 우물 안의 개구리였구나!
아, 나는 참 바보처럼 살았구나!
그러므로 깨달음의 과정에는 세탁과 교정이 꼭 필요합니다.
욕망에 의해 오염된 생각이나 사고방식은 세탁을 하고,
편견에 의해 왜곡된 생각이나 사고방식은 교정을 해야지요.
그러나 세탁이나 교정은 보통 우리 스스로 하지 못합니다.
욕망하던 것이 실패로 인해 좌절되거나
내가 소유했다고 생각한 것이 상실이 되거나
편견이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깨지거나 해야 되지요.
그런데 실패, 좌절, 상실, 충격, 이런 것이 바로 하느님이
우리의 오염되고 왜곡된 생각을 정화하고 교정해주시는 수단과 방법이고,
하느님은 또한 이런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여시어
앎이 머리에서 마음으로 내려와 머리로 안 것을 마음으로 깨닫게 하십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는데
이는 당신이 세상에 살아계실 때 그렇게 제자들 마음을 열려 하셨고,
그렇게 성경을 깨닫게 하려고 가르쳐주셨지만 안 되던 거였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그 뜻을 풀이해주시고,
성경 말씀대로 당신이 어떻게 돌아기실지 말씀해주셨어도 깨닫지 못했지요.
세속적인 욕망과 편견으로 알아들었기 때문인데
당신과 같이 수난의 잔을 마실 수 있냐고 하셨을 때 마시겠다고 한 것이나
당신이 나무에 높이 들어올려져야 한다고 하셨을 때
예수님께서 왕좌에 오르실 거라고 착각을 한 것이 바로 그 예입니다.
주님께서 왕좌에 오르실 때 그 왼 편과 오른 편에 앉는 것에 눈이 멀었기에
성경 말씀의 진실한 뜻과 그것을 풀이해주시는 것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께서 허망하게 돌아가시고 자기들의 욕망도 좌절되었을 때
욕망은 정화되고 편견은 교정되어 이제 성경 말씀이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얘기에서 제자들이 서로 얘기하지 않습니까?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자기의 욕망과 자기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이 그것으로 포화상태이기에 주님의 말씀이 들어올 수 없음을,
우리의 마음이 정화되고 열려야 주님의 말씀이 들어와
깨달음을 주실 수 있음을 깨닫게 되는 오늘 부활 제 3 주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