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물면 자연 사랑을 실천하게 되고,
사랑을 실천하면 자연 사랑 안에 머물게 된다.
이것이 오늘 제가 결론처럼 묵상한 내용입니다.
수도생활에 두 가지 양식이 있습니다.
마르타의 사랑을 사는 활동수도자의 삶과
마리아의 사랑을 사는 관상수도자의 삶입니다.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하는 사랑의 삶의 두 형태와 다르지 않고,
오늘 부활 제 5 주일의 가르침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 안에 머무는 삶에 대해서 얘기하고,
서간은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삶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먼저 우리는 주님 안에 머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 안에 머무는 삶을 살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이는 마치 충전하지 않은 건전지를 가지고 손전등을 키려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소리이고 불가능한 사랑을 하겠다는 얘기밖에 안 됩니다.
우리 삶에서 숱하게 벌어지는 것, 곧 사랑하겠노라고 사랑을 시작했는데
사랑이 이내 미움으로 바뀌는 것은 사랑이 거덜 나 미움이 된 경우지요.
조금 있는 사랑 톡톡 털어 사랑을 했으니 이제 사랑을 다시 채워야 하는데
우리는 그 사랑을 상대의 보답 사랑으로 채우려고 하고 요구를 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사랑했으니 이제 네 사랑으로 나를 채워줘야 돼’라고.
그런데 상대도 사랑 받기만 원하지 해줄 수 없어 사랑의 보답을 못하면
그 사랑했던 것이 고스란히 미움으로 바뀌곤 하지요.
방전된 건전지를 대용량 충전기에서 충전해야 하듯이
거덜 난 우리의 사랑은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채워야 하는 것이지요.
특히 수도자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데 우리가 성사를 볼 때
자주 하느님을 사랑치 못했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지 못했음을
아주 따끔하게 충고할 때가 있고 그때 그분들은 깜짝 놀라 되묻습니다.
사랑치 못했다고 겸손하게 죄를 고백했는데 왜 교만하다고 하느냐고?
사랑하지 않은 죄를 고백할 것이 아니라 그 전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 그 사랑 안에 머물지 않았음을 고백해야 하지요.
사실 사랑하지 않은 죄가 크지 않고 사랑을 받지 않은 죄가 훨씬 더 큽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러 완전충전이 되면 사랑은 사실 저절로 되는 법인데,
그러면 왜 우리는 하느님 사랑에 머물지 못하는 걸까요?
하느님 사랑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안다고 해도 사랑 안에 머무는 것에 실패해서 그러기 십상이지요.
지금 저는 재속 프란치스칸 서약피정 지도를 위해 피정 집에 와 있는데
어제 1강의를 하고 주변을 산책했습니다.
그런데 하얀 나비가 너풀너풀 쌍으로 날며 꽃 위를 노니는 거였습니다.
그때 저는 문득 벌과 나비는 꽃 위를 날고 꽃밭에 머물고,
쉬파리와 똥파리는 피를 쫓고 똥 위에 앉겠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거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에 머물지 못함은 어떤 기술문제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을 좋아하거나 사랑하지 못해서이고
하느님 사랑보다 쉬운 사랑이나 다른 사랑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너무 쉽게 하려고 합니다.
감각적인 사랑과 감성적인 사랑만 하려하는 거지요.
내 귀에다 끊임없이 사랑한다고 속삭여주는 사랑을 원하고
따듯하게 팔로 꼭 안아주는 사랑을 원하기에
사랑치 않는 것 같은 하느님 사랑은 느끼지도 못하고 재미가 없습니다.
연인의 풋사랑은 닭살이 돋을 정도로 감각적이고 이벤트 사랑입니다.
그 연인의 사랑이 엄마의 사랑보다 더 달콤하고 그래서
그 사랑을 쫓아 부모를 떠나 연인에게로 갑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사랑인 엄마의 그 큰 사랑은 당연하고 지겹다고 하고
연인의 사랑은 너무도 작은 사랑이기에 그 사랑의 표시를 내야만 하는
그런 사랑인데 그 사랑이 짜릿하고 달콤타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과 나의 사이의 사랑도 이런 것이 아닌지 반성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