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오늘 주님께서 필립보 사도에게 <이토록 오랫동안>이라는 표현을 쓰시며
그리 오랫동안 당신과 함께 지냈는데도 당신을 모르냐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이 장면이 되레 <이토록 오랫동안> 하느님을 뵙고자 애썼는데
어찌 아직도 뵐 수 없냐고 필립보가 주님께 안타까움과 갈망을
토로하는 모습으로 바뀌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장면은 주님과 사도들 간에
서로의 안타까움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주님은 주님대로 당신이 하느님을 보여주고자 그리 애를 썼는데도
어찌 당신을 통해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지 안타까워하시고,
사도들, 특히 필립보는 필립보대로 하느님을 뵙고자 하는데
어찌 하느님을 뵐 수 없는지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안타까움을 얼마 전서부터 꽤 좋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움은 사랑과 열망과 잇닿아 있는 감정이랄까 마음이거나
어쩌면 사랑과 열망 그 자체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분노와 안타까움을 비교하면 알 수 있습니다.
분노나 안타까움 모두 원하는 대로 안 될 때 생기는 것이지만
분노가 내 뜻대로 안 될 때 폭발하는 자기중심적, 파괴적인 감정인데 비해
안타까움은 잘 되기를 바라는데 바람대로 되지 않을 때 생기는 연민이지요.
그리고 분노는 요즘 많이 얘기되듯 힘 있는 사람들의 갑질인데 비해
안타까움은 힘이 없어 어쩌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약자들의 몸짓이요 마음 씀이지요.
그리고 분노가 나에게든 남에게든 분노의 대상에게 악감정을 퍼붓는 거라면
안타까움은 나든 남이든 사랑의 대상을 위해 바치는 기도가 될 수도 있지요.
아무튼 분노든 안타까움이든 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생기는 거지만
분노는 감정을 배설하고 마는 것이요 자포적인 감정의 해소일뿐인데 비해
안타까움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갈망이요 기도인 것입니다.
이런 것이기에 필립보 사도가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고 한 것은
뵙게 해주길 청치 않는 다른 사도나 우리보다 아둔한 사람의 요청이 아니라
다른 누구보다도 뵙기를 갈망하는 열혈 구도자의 간청인 것이고,
그리고 사도들을 대표하고 우리를 대신하여 아뢰는 간청인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을 보면 필립보 사도는 자신만 하느님을 뵙게 해달라고
청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뵙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필립보 사도는 분명 자기만 하느님을 뵙게 해달라고 하지 않고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필립보 사도에게 감사해야 하고 반성도 해야 합니다.
사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늘 복음의 다른 사도들처럼
못 뵈었는데도 본 척 하며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거나
하느님을 못 뵙고도 아무 문제가 없는 듯 살거나 뵙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뵙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고 그래서 뵙고자 끙끙대는 것을
당장 먹고사는 일이 급한데 한가로운 짓을 한다거나
쓸데없는 것에 애를 쓰는 거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이것은 영원을 생각지 않는 것이고
현세를 놓고 보더라도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놓치고 사는 것입니다.
저는 사춘기 때 하느님이 안 계시다면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서 고뇌와 방황을 오랫동안 했습니다.
이 삶의 의미를 모르고 이 악한 세상에서 고통스럽게 살 이유가 없었고,
그래서 그 의미를 영영 알 수 없다면 죽는 것이 낫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이런 고민 때문에 저는 우울했고 공부를 할 수 없었으며, 다른 사람들
특히 어른들이 볼 때는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으로 보였을 겁니다.
하루는 어깨가 축 처진 채 제가 걸어가는 것을 보고 저의 큰 아버지가
혀를 끌끌 차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이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방황을 했고 그래서 수도자가 되었는데
오랫동안 방황을 하여 하느님도 찾고 인생의 의미도 찾았지만 지금 와
돌아보면 더 오랫동안 찾았어야 하는데 멈춘 것 같아 이것이 안타깝습니다.
안타까운 일들이 자꾸 떠오릅니다.
밤하늘위에서 별들이
살아나듯이 말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