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우리는 당신이 말씀하시지 않아도
서로 사랑하려고 한다고 하며 주님의 이 당부랄까 명령을
할 필요가 없는 얘기나 쓸데없는 잔소리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의 사랑 당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서로 사랑하기>가 아니며 그래서 오늘 신신당부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서로 사랑하기>는 그야말로 서로만 있습니다.
주님은 빠져 있고,
주님의 사랑 방식이 아니라 자기식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려 합니다.
그런데 서로는 끼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을 한다면
우선 우리는 하느님을 빼놓고 우리끼리만 서로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어제 저의 조카 중 마지막 놈이 결혼을 하였습니다.
주례 강론을 하면서 앞으로 살다보면 어려운 일이 닥칠 텐데 그때
서로 사랑하며 두 손 꼭 잡고 어려움 헤쳐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느님 꼭 붙잡고 헤쳐 나가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우리 신앙인은 서로 사랑하는 것뿐 아니라 오늘 주님 말씀대로 먼저
주님 사랑 안에 같이 머물며 주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그 외에도 우리는 각가지 끼리 끼리를 조심해야 합니다.
가족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족끼리만 서로 사랑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고,
신자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자들끼리만 서로 사랑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며,
남북이 원수 되지 않고 서로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민족끼리만 서로 사랑하는 거여서는 안 되겠지요.
저는 안 중근 토마스를 생각합니다.
안 중근 의사가 신자였기 때문인지 몰라도 저는 갈수록
안 중근 의사의 위대함을 생각하게 되는데 그의 위대함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아시를 침공하면서 대동아공영을 내걸 때
안 중근 의사는 동양의 평화를 주장하였다는 점이고
이등박문을 암살한 것도 민족주의 때문이 아니라 이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 한 것이라고 주장한 점이지요.
요즘 남북이 서로 힘을 합쳐 대결국면을 해소하려 하면서
China Passing이니 Japan Passing이니 하는 말이 나오는데
그렇게 속 좁게 굴어서는 안 되고 안 중근 토마스의 주장대로
같이 평화롭게 가는 길을 우리는 지향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주님처럼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사랑을 하되
주인이 종에게 하는 사랑이 아니라 친구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기우는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인격으로 사랑하는 거지요.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저는 이곳 가리봉에 온 다음
수도원 안팎에서 이런 면에서 중요한 사랑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전에도 머리로는 이런 사랑을 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리고 아직도 이전의 못된 사랑 습관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여러 여건이 기울지 않는 사랑을 하도록 저를 도와줍니다.
아무튼 동등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오늘 사도행전의 예처럼
차별하지 않는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고 그 사랑을 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면 참으로 이상하지만
베드로 사도를 비롯하여 초대 교회 신자들은
성령께서 다른 민족에게도 내리는 것을 체험하며 놀라워합니다.
우리는 서로 참 다르지만 같은 성령을 받았음을 믿을 때
다름을 존중할 것이고 그래서 다르기 때문에 차별하거나
다르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을 특별히 묵상하는 부활 제 5 주일입니다.
기울지 않는 사랑을 제대로 하며 살아가는지를
묵묵히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