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천은 떠나가심이 아니라 앞서가심이고,
앞서가심은 홀로가심이 아니라 따라가게 하심입니다.
이것이 제가 이번 승천축일에 묵상한 것인데 제가 늘 생각하는 것은
주님이 승천하는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겁니다.
주님 홀로 하늘로 올라가버리고 마는 거면 우리는 버림받고 마는 것인데
그것이 뭔 축일이고 더군다나 뭔 기릴만한 축일인가 하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승천축일은 오늘 본기도와 감사송의 내용처럼
그것이 우리의 희망이 되고 뒤따라야 할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올라가신 하늘나라에
그 지체인 저희의 희망을 두게 하소서.”
“주님께서 으뜸이며 선구자로 앞서 가심은
당신 지체인 저희도 희망을 안고 뒤따르게 하심이옵니다.”
그러므로 이 축일을 지내며 우리가 먼저 봐야 할 것은 우리의 희망인데
주님처럼 하늘로 올라감이 진정 우리의 희망인지 보는 것이고,
그래서 물어야 합니다. 승천이 우리의 희망인지. 아니라면 그 이유가 뭔지?
그 이유가 뭡니까? 하늘을 사랑치 않아서입니까, 이 세상을 사랑해서입니까?
승천이 우리의 희망이 아닌 이유는 무엇보다도 사랑치 않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남녀가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있는데
떨어져 있어도 보고 싶지 않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늘로 오르신 주님과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있는데
그 하늘로 오르고 싶지 않고 그래서 오르는 것이 희망이 아니라면
그 사랑이 무슨 사랑입니까? 아직 사랑이 싹트지도 않은 것이고
사랑이 불타고 무르익은 것은 더더욱 아니지요.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한 번이라도 맛보았으면
사랑치 않을 수 없을 텐데 그 한 번을 아직 맛보지 못한 것이지요.
그런데 하늘나라의 그 맛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실은 이 세상이 나름대로 맛있고 재미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과 하늘나라의 맛을 대리 만족케 하는 것들을
끊거나 끊을 수 없다면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것들이 싫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은총으로 싫어져야 한다면 어떻게?
그것은 병이 나면 온갖 입맛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거지요.
그러니 이 세상에서 병이 나고 탈이 난 것이 실은 이 세상 것에 대해
우리 입맛이 떨어지게 하고 하느님 나라를 맛들이게 하는 은총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욕망했던 것이 가져다주는 허무의 쓴 맛과
갖가지 고통을 통해 천상의 새로운 맛을 갈망하고 희망케 하시는데
그런 다음 당신이 하늘로 앞서가시며 우리도 따라오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오르기 전에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하늘로 오르시기 전에 이 세상에서 하신 것이고,
당신이 먼저 하시고 오늘 제자들에게도 명하신 것입니다.
곧 온 세상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것인데 그런데 이 역시
아무리 주님의 명령이고, 아무리 우리가 전하려 해도 우리가 할 수 없으면
곧, 우리가 행복하지 않고 복음화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은 차야 넘치는 것이고 그래서 차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하듯,
행복과 복음도 차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저 기다리면 되는 겁니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사실 아무 것도 없고 할 것이 있다면 하느님 사랑으로 채우는 것인데
세속 욕망을 비우고 하느님 사랑을 갈망하기만 하면
하느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차올라 이웃 사랑으로 넘치는 거지요.
이는 빈 항아리와 같습니다.
항아리를 물로 채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항아리를 비워야 합니다.
그런 다음 물이 있으면 항아리를 물에 잠그고 없으면 빗물을 받으면 됩니다.
그 옛날 저의 외할머니는 우물이 없어서 빗물을 받아 쓰셨는데
늘 항아리를 비워놓으셨고 비 오면 뚜껑을 열어 빗물을 받으셨지요.
우리 안에 사랑의 샘이 없다면 이처럼 항아리를 비우고 뚜껑을 열기만 하면
오순절 사도들이 성령충만했듯이 우리도 사랑의 성령으로 차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불로 저를 태워 주소서
비우고 따라가겠습니다.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