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가 이런 말을 하자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면서 회중이 둘로 갈라졌다.”
저는 오늘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바오로 사도의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묵상을 했습니다.
자기를 법정에 세운 지도자들이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로 구성되어 있음을
간파하고는 이간계라고 할까 반간계를 쓴 것입니다.
이간계란 적을 물리치는 방법 중의 하나로 적 안에
대립되는 두 세력이 서로 갈라져 싸워 스스로 무너지게 하는 계략이지요.
여기서 생각나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하신 말씀입니다.
뱀처럼 슬기로우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바오로 사도의 행위가 바로 여기서 말씀하시는 뱀처럼 슬기로운 것인가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뱀처럼 슬기로운 것은 또 어떤 뜻인가요?
박해를 받을 때 비둘기처럼 순박하라는 것이 야훼의 종의 노래에서처럼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이 거역하지 않듯 박해를 순히 받아들이라는 뜻이라면
뱀처럼 슬기로우라는 것은 맥없이 잡아먹히지 말고 피하라는 뜻 아닐까요?
뱀은 창세기에서 간교한 동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간교함이나 슬기로움이나 사실 같은 어원의 말입니다.
지혜를 나쁘게 쓰면 간교함이 되고 좋게 쓰면 슬기로움이 되는 거지요.
우리는 순교의 열망, 곧 사랑 때문이 아니면 괜히 죽을 필요가 없고,
반대로 복음 선포를 위해서라면 악한 짓이 아닌 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바오로 사도의 행위는 우선 악한 짓이 아닙니다.
그들을 갈라지게 한 것이 원래 사랑하던 사이를 갈라지게 하였거나
그래서 그들이 죄와 불행의 상태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원래 갈라져 있다가 바오로 사도를 죽이는 안 좋은 일에
하나가 되었던 자들이기에 할 수만 있으면 시편 말씀대로
그들,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에게는 로마에서의 복음 선포라는,
살아야 할 더 중요한 이유랄까 목표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행전의 끝부분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순교하신 김대건 사제도 위대하지만
살아서 복음을 선포하신 최양업 사제도 위대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 최양업 사제에게 순교의 열망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순교의 열망과 복음 선포의 열망은 같은 하느님 사랑에서 나온 열망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가 죽은 것이 좋은 건지
더 오래 사는 것이 좋은 건지 두 가지를 놓고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빨리 순교하고 싶지만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는
자신이 더 오래 살아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선교는 순교입니다.
순교도 사랑이고 선교도 사랑입니다.
순교는 하느님을 사랑하지만 하늘로 사랑을 바치는 것이고
선교는 하느님을 사랑하지만 세상에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자기만 살려는 지혜는 간교함이나 영악함이 되지만
사랑의 지혜는 모두를 구하는 슬기로움임을 묵상하는 오늘,
영악함과 슬기로움 사이에서 고민하는 오늘입니다.
비내리는 성거산 숲을 걷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