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 여러분,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심판받지 않습니다.
심판자께서 문 앞에 서 계십니다.”
야고보서는 오늘 서로 원망치 말라는 권고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까지 별로 남을 원망치 않고 살아 왔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착하고 거룩하게 살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남을 원망하지는 않고 분노는 많이 하며 살아왔으니 말입니다.
제가 원망 비슷한 것을 한 것은 돌아가신 아버지한테였는데요,
원망 비슷한 것을 했다고 한 이유는 아버지에게 원망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이 원망스러웠을 뿐이기 때문이고,
아버지에게 원망한 게 아니고 하느님께 원망을 한 거기 때문입니다.
만일 저의 아버지가 자살을 하셨거나 방탕하게 살다가 그 탓으로
저희 자식들을 일찍 놔두고 돌아가셨다면 원망이
아버지에게로 향하였겠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열심히 그리고 신앙적으로
훌륭히 사시다가 돌아가셨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원망스러웠지만
원망의 화살은 아버지를 일찍 데려가신 하느님께 향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설사 제가 아버지께 원망을 하였더라도
아버지가 오래 살아주셨기를 바라는 마음대로 되지 않은
아쉬움 정도의 감정이지 원한이나 분노의 감정은 아니었습니다.
원망에 비해서 원한이나 분노는 복수의 감정이고 파괴의 감정이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인간이 서로 원망하는 것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기에
야고보 사도는 원망치 말라는 것인데 그것은 원망이
고통, 불행, 실패의 탓을 남에게 돌리는 비생산적인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고통, 불행, 실패의 탓을 자신에게 돌리고, 그래서
고통, 불행, 실패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아 고치면
고통, 불행, 실패가 반복되지 않을 뿐 아니라
지난날의 고통과 불행과 실패가 오히려 행복과 성공을 낳는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고통과 불행과 실패가 되는데 원망은 그렇지 않은 거지요.
그래서 자신의 불행을 남 탓하는 원망을 하는 한
불행은 과거로부터 현재에 그치지 않고 미래에 이르기까지 계속됩니다.
그런데 오늘 야고보서는 원망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에,
곧 주님의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것은 원망이 사랑이 아니고 그래서 죄이기 때문에
심판 받지 않으려면 원망하지 말라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서로에게 향하는 원망에는 하느님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서로에게는 원망스러울 수 있지만 원망치는 말고
원망은 하느님께 하라고 말씀드리고,
그래서 원망을 하지 말고 원망을 드리라고 말씀드립니다.
기도가 되게끔 말입니다.
쉬운 것은 아니지만 저는 모든 것이 기도가 되게 하려고 노력하고,
기회가 될 때마다 같은 권고를 다른 분들에게도 하는데
이웃에게 쏟아 부으면 부정적인 감정의 토로에 불과하지만
하느님께 드리면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분노가 치솟을 때
그때는 하느님도 보이지 않고 죽이고 싶은 그 사람만 보이겠지만
바로 그때 하느님을 생각하고 분노의 감정을 하느님께 드리면,
하느님 저 인간 죽이고 싶은데 죽여주시라는 기도가 되는 거지요.
원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우리는 원망을 서로에게 하여
그래서 그것으로 그저 감정이나 해소하려 하지 말고
하느님께 원망을 드려 기도가 되게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