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가운데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양 노래를 부르십시오.”
기도가 잘 안 된다고 하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분심잡념이 든다는 뜻이지만
근심걱정과 고민이 있을 때 거기에 빠져 기도가 안 된다는 뜻입니다.
큰 고통을 겪을 때 모두가 즉시 고통에서 구해주십사 기도할 것 같지만
신앙인이라고 하는 사람 가운데서도 많은 이들이
수도자라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많은 이들이
의외로 그저 고통에서 허우적거리지 그것을 가지고 기도할 줄 모릅니다.
고통만 보고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고,
괴로워만 하지 기도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통의 초등 단계에서는 고통이 하느님보다 크기 때문이고,
우리의 모든 관심이 온통 고통에만 쏠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고통뿐 아니라 뭐든지 새로운 것이 나타나면
우리의 관심과 신경은 새로운 것에 쏠리기 마련이지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 물건이 어떤 것인지 보기 마련입니다.
게다가 그것이 그저 그런 것이 아니고 내가 아주 좋아하는 것이거나
반대로 아주 싫어하는 것이면 더더욱 거기에 온통 신경이 쏠리게 되는데
좋은 것은 갖고 싶어서 거기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고,
싫어하는 것, 곧 고통은 그것이 빨리 떨어져나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헌데 이것이 떨어지지 않을 경우 이제 나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십자가를 처음 지게 되면 그것을 거부만 하다가
거부해도 안 되는 것임을 알면 차츰 나의 십자가 되고
더 지나면 차츰 주님의 십자가를 내가 지는 것으로 발전을 하지요.
저는 여기서 하나의 법칙을 봅니다.
고통이 숙성이 되면 기도가 된다는 것 말입니다.
물론 오래 되면 모든 고통이 그 자체로 기도를 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고통이 내게서 떨어져나가기를 바라던 것이
내가 고통에서 구원되기를 바라기 시작하면서 기도는 시작되고
고통이 숙성되어 기도가 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고통이 내게서 떨어져나가는 것과 고통에서 내가 구원되는 것이
같은 것 같지만 고통에서 내가 구원되는 것은 고통은 여전히
내게 있지만 그것을 내가 넘어서게 되는 것이고,
그리고 고통을 넘어설 때도 내 스스로 그것을 넘어서지 않고
하느님 도움으로 넘어서려 할 때 기도가 되는 것임을 말입니다.
최민순 신부님의 <기도>라는 시에서
바위가 내 앞에서 치워지기를 기도하지 않고
그 바위를 넘어설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런데 고통이 숙성되면 기도가 되기가 쉬운데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는 즐거움은 기도가 되기 훨씬 어렵습니다.
싫어하는 것을 하는 것이 고통/괴로움이고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이 쾌락/즐거움인데
고통은 우리가 거기서 구원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기도가 되지만
쾌락/즐거움은 원하는 것이기에 계속 거기에 빠져들고 몰입되어
그것이 싫증이 나지 않는 한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게임을 하면 먹는 것도 잊고 게임에 빠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우리의 즐거움이 쾌락이나 환락이 아니라
신락神樂이 되도록 애초부터 그런 즐거움을 찾아야 함을 유념하고
신락의 경지에 들어서면 일할 때도 성가가 절로 나오듯 그리 되게 합시다.
저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