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와서 나를 따라라.”
오늘 독서 베드로 서간과 복음을 보면 공통점이 있는 말들이 나옵니다.
하늘이라는 말이 공통적으로 나오고,
하늘에 보존되어 있는 상속 재산과 하늘의 보물이라는 말이 나오며,
구원이라는 말이 공통적으로 나오고,
마지막 때라는 말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재물과 보물이 비교되고
이 세상과 하늘 또는 하느님나라가 비교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면서
역시 제가 나이를 먹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에 그것도 아주 전에는 <마지막 때>이니 <하늘의 상속 재산>이니
하는 말을 들으면 지금 여기서 사는 것이 큰일이고 발등의 불인데
무슨 마지막 때 타령이나 하고 하늘의 상속 재산 타령을 하나
그런 느낌이 솔직히 없지 않아 있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반대로 지금 여기서 아등바등 살아 무엇 하나
죽으면 그만인데 하는 생각이 들고
내가 지금 열심히 사는 것이 뭘 위해 열심히 살아야하는 건지 생각하고,
나의 구원이라는 실속을 차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제가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사실 제가 옛날에는 세상을 구원한다고
깝죽대면 저의 구원은 덜 신경 쓰고 살아서 실속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제가 왜 가리봉에 왔는지, 왜 공사장에 나가 일하는지
궁금해 하며 조선족 선교 또는 사목을 위한 거냐고 추측성 질문을 하시는데
그것은 2차적인 것이고 저의 구원이 1차 목적이라고 제가 이제는 답합니다.
그리고 저의 구원도 전에는 이 세상에서의 하느님 나라 소유였는데
이제는 목표가 확실히 수정이 되어 이 세상에서부터 시작되지만
이 세상을 끝내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느님 나라의 상속 재산과 보물을 소유하기 위해
이 세상의 재물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면에서는 제게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굶주려 허기질 정도만 아니면 다른 것들은 없어도 좋습니다.
없으면 조금 불편하지만 어떤 때 삶이 가벼워져 더 좋기 때문입니다.
사실 재물이나 물질은 있으면 좋은 일에 쓸 정도의 가치만 있고,
(오늘 주님 말씀대로라면 가난한 이에게 나눠주기 위해 필요한 정도)
그래서 제게 있어 큰 문제는 물질적인 어려움이나 시련이 아니라
관계적인 어려움이랄까 시련들입니다.
사람들로부터 그것도 내가 사랑과 존중을 받고 싶은 사람들로부터
오히려 반대를 받고 비판을 받는 것이 아직 받아들이기 쉽지 않고,
그보다 더 무시당하는 것은 두려워할 정도이고 그래서 피합니다.
그래도 나아진 것은 존경은 말할 것도 없고 존중을 받지 않아도 되며
무시만 당하지 않으면 되고
더 나아가 무시당하길 좋아하는 제가 되기를 바라는 정도는 되었습니다.
정말로 이 세상에서 미천하고 무시당하는 자 되어야
하느님 나라는 더 갈망하고,
이 세상은 애착하지도 안주하지도 않을 테니 말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 시련을 순금이 되게 하는 단련에 비유합니다.
황금이 순금이 되기 위해서는 불로 단련을 받아
정련이 되는 과정이 필요하듯 우리의 신앙도 시련을 받으면
단련이 되고 불순물이 사라져 순수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시련을 단련과 정련의 기회로 받아들일 때만 이것이 가능한 것인데
무시당하는 것은 여전히 두려워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한 저이고 오늘입니다.
노동현장의 먼지 속에서 땀을 흘리시는 주님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