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오늘 사도행전은 바르나바 사도를 <착한 사람>과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으로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 바르나바 사도를 통해 보면 좋을 것입니다.
우선 자신을 공동체에 다 내어주는 사람입니다.
바르나바는 신자들의 초기 공동체에 제일 먼저
자기의 전 재산을 내어놓은 사람이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내어놓게 한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바르나바는 은총으로 모든 것을 충만히 받은 체험을 하였기에
자기의 것을 챙기지 않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와 자기의 것을 챙기고 내어주지 못하는 사람은
착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으로 거저 받은
체험이 없는 사람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바르나바는 위로의 사람입니다.
바르나바는 원래 이름이 요셉이었는데 위로의 사람이라는 뜻의 바르나바를
사도들로부터 이름 받을 정도로 정말로 위로를 잘한 사람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위로하기 보다는 위로 받고자 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바르나바가 위로를 잘 할 수 있었던 것 또한 바르나바가 그저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성령의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슬픔을 같이 아파하면서도
위로해줄 수 있는 내면적이고 깊이가 있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바르나바는 인도자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은 바르나바에 의해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됐다고 하는데
그 수많은 사람 중에는 바오로 사도도 끼어있습니다.
물론 바오로 사도는 주님 친히 부르셨지만 사울을 여전히 의심하는
사도들의 교회 공동체에 인도한 것은 바르나바였습니다.
사실 남에게 좋은 것을 주는 사람도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지만
더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은 좋으신 주님께 남을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가진 좋은 것을 주는 것보다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주님께 직접 데리고 가는 것이 더 사랑이고 더 좋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바르나바는 파견된 선교사, 복음 선포자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마지막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받은
안티오키아 공동체의 예언자와 교사였던 바르나바가 파견되는 얘기입니다.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를 자신의 교회라 여기고 안주할 수도 있었지만
공동체의 파견에 즉시 그리고 군소리 없이 복음 선포/선교를 위해 떠납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주님의 파견이 아니라 공동체의 파견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바르나바와 사울을 파견한 것은 기도와 단식을 통해
성령의 파견을 들은 안티오키아 공동체입니다.
요즘 제가 걱정하는 것은 파견을 받지 않으려는,
그래서 파견의 음성에 아예 귀를 닫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있지만
이에 못지않게 걱정되는 것은 파견은 파견이로되 셀프파견이 많다는 겁니다.
물론 아무도 자신의 파견을 셀프파견이라고 생각지 않고 주님의 파견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제가 보기에 공동체의 파견은 거부하면서 다시 말해서
그것은 주님의 파견이 아니고 자신이 가려는 곳이 주님의 파견이라면서
자기 생각대로 갈 경우 주님의 파견이 아닌, 셀프파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바르나바는 공동체가 가라는 대로 갔고 그래서 착한 선교사입니다.
주님의 파견을 공동체와 같이 식별하는 우리가 되기로 결심하는 오늘입니다.
성령의 이끌림에 예민하게 따르며
기쁘게 나서는 오늘 입니다.
영육간의 건강하심을 주님께 청합니다.
하여 선교의 길 바른 길을 알 차게 걸어가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