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위의 구절을 읽으면서 <그러나>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는 보통 강한 반전을 얘기할 때 쓰이는 접속사지요.
예를 들어 주님께서는 이 <그러나>를 많이 활용하셨는데
구약에서 살인하지 말라했지만 <그러나> 주님은 욕도 하지 말라고 하시고,
구약에서 간음하지 말라했지만 <그러나> 주님은 생각조차 말라하시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의 경우에는 강한 믿음을 나타내는 접속사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오늘 얘기는 공관복음에 다 나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마태오복음은 다른 두 복음과 다릅니다.
다른 두 복음에서는 회당장의 딸이 죽어갈 뿐 아직 죽지 않았는데 비해
오늘 마태오복음에서는 방금 죽은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니 이 얘기의 실제 여부가 의심이 되고,
실제 얘기라면 어떤 것이 맞는 건지 논란꺼리가 될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마태오복음에서는 딸이 이미 죽은 것으로 나오고,
죽었지만 <그러나> 주님은 살리실 거라고 애비는 강한 믿음을 표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는 것은 회당장처럼 <그러나> 믿는 것입니다.
죽었지만 <그러나> 살아날 것이라고 믿고,
우리 인간은 못 살리지만 <그러나> 주님은 살리실 거라고 믿는 겁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근거는 물론 나, 우리가 아니라 주님입니다.
첫째는 주님의 능력이 우리 믿음의 근거이고,
둘째는 주님의 사랑이 우리 믿음의 근거입니다.
사실 하느님이시라면 죽음을 생명으로 돌리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지요.
하느님은 모든 것을 있게 하신 분이기에 당신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
아무 것도 없고, 못하실 것 아무 것도 없으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구두를 만든 사람이 구두를 고칠 수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문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인데
전능하시다면 사랑이 없거나 사랑을 못하실 리 없지요.
전능하신 하느님의 제일 큰 능력이 사랑이기 때문이고,
전능으로부터 사랑이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이렇고,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사랑이 우리 믿음의 근거입니다.
문제는 실제로 우리가 믿느냐의 문제입니다.
무신론 철학자인 포이에르바하는 신이란 유한한 인간의 무한한 욕망의 투사,
무한에 대한 욕망의 투사일 뿐이라고 하였는데
제 생각에 그 반대의 맥락에서 유한한 인간의 자기 투사가
전능하신 하느님과 사랑의 하느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머리는 무한을 인식하고 하느님의 무한성과 전능을 인정해도,
마음은 경험에 갇히거나 영향을 받기에 한계를 넘으시는
하느님의 능력과 사랑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나 체험>을 해야 합니다.
죽었지만 그러나 하느님께서 살리신 체험을,
우리는 못했는데 그러나 하느님께서 하신 체험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하느님의 체험은
내 힘으로 할 수 없었던 체험, 곧 한계체험, 절망체험의 결과이고,
한 때 악으로 체험되고 벌로 느껴지던 고통과 실패의 결과입니다.
딸이 죽어 가는데 내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한계체험이 없었다면,
결국 죽어버린 절망의 상황이 없었다면 회당장의 하느님 체험도 없었음을
우리 삶에 적용하라는 가르침을 받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