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고생하고 무거운 짐 진 우리들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하신 주님께서
오늘은 안식일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주님께서는 오늘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시며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냐고 따지는 바리사이에게
사람이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왜 사람의 아들임을 굳이 강조하시면서
또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임을 역설하시는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 사람의 아들이 되심으로
우리가 당신처럼 하느님의 아들이 되고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점을 일깨우시려는 것이 아닐까요?
분명 그럴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안식일의 주인이어야 하고,
그러므로 안식일의 주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이는 남의 안식을 억압하지 말라는 말씀이자
남으로 인해 나의 안식이 좌우되지도 말라는 말씀이고
법에 얽매이지도 말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안식일에 쉬건 일을 하건 그것은 주인인 내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일을 하고 내가 쉬는 건데 그 일과 쉼을 내가 결정하지 못하고
돈 때문에 일을 하고 돈을 주는 사람이 쉬라고 할 때만 쉬어야 한다면
나는 돈의 노예이거나 안식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것이지요.
제가 요즘 사람들이 보통 말하는 노가다, 곧
일당 막노동을 하면서도 행복한 이유 중의 하나는
제가 이 일을 선택하였고, 오늘 일을 나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제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싫은데도 내몰려서 어쩔 수 없이 하거나
처자식 먹여 살려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한다면
막노동이나 하는 제 인생은 비참할 것이고
그럴 수밖에 없는 저는 행복할 수가 없을 겁니다.
옛날에 전라도 어느 섬에 가서 마늘 캐는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눈 뜨면 밭에 나가 일하고 해지면 돌아오는 고된 노동이었습니다.
그 일을 하는 중 하루는 한 할머니가 혼잣말로
‘나는 사람도 아녀! 소야 소! 먹고 노상 일만 하니!’하고
한탄을 하시는데 그 말씀이 제 가슴에 꽂히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노동을 하는데 노동은 신성한 거라는 교회의 가르침이
어떻게 통할 수 있고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우리가 안식일의 주인이 되기 어렵습니다.
상황적으로는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 일할 수 없고
그러니 쉬고 싶어도 잘리지 않기 위해 쉴 수 없는 현실이라는 뜻이지요.
결국 이런 상황 안에서 최대한 나 스스로 주인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제의 가르침과 연결시킨다면 이런 현실에 분노하지 않고
온유와 겸손으로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사랑으로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똑같은 빗자루 질이지만 사랑으로 하면 사랑이 되듯
사랑으로 할 것인지 일로 할 것인지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피할 수 없으면 즐기며 하자!’고 확실히
포스트모더니즘 세대답게 즐기는 것을 현명하게 선택하듯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답게 사랑으로 일을 선택하고
일을 사랑으로 하기로 매 순간 사랑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일과 사랑 중에 사랑을 선택하는 오늘이 되도록 하십시다.
"사랑을 선택하는" 나날의 삶 속으로 걸어가게끔
오늘도 사랑의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과 사랑의 선택중에
사랑을 선택하도록
제 마음에 성령의 바람과 불을 모셔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