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
오늘 독서에서 엘리야는 죽여 달라고 주님께 하소연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제가 보기에는 진심이 아닙니다.
진심이었다면 일어나 먹으라고 할 때 일어나지도 먹지도 말았어야지요.
그런데 일어나 먹으라고 하니 냉큼 일어나 먹고 먼 길을 떠납니다.
그러니까 죽여 달라는 것은 진심이 아니고 뭔가 다른 감정의 토로지요.
저도 가끔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는데 물론 진심이 아니기에
정말로 살고 싶어 투병을 하고 있는 분들을 생각하며 이내 반성합니다.
살고 싶지 않다는 저도 정말로 죽게 되면 틀림없이 살고 싶어 할 텐데
그렇다면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은 일시적인 감정으로서
이렇게 사는 것은 싫다는, 이렇게 계속 살기는 싫다는 뜻일 겁니다.
그렇다면 엘리야의 삶이 도대체 어땠기에 그런 삶은 살기 싫다는 것일까요?
구차한 삶이었지요. 갈멜에서 거짓 예언자들을 쳐 죽인 것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왕비 이제벨에게 쫒기는 구차한 삶이었지요.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 쫓기듯 살면 그런 삶은 누구나 구차하다고 느껴지고 살기 싫지요.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하루살이 인생이라는
느낌이 들면서 어차피 미래가 없다면 이런 삶 조금 더 사나
조금 일찍 죽으나 마찬가지이니 빨리 끝내고 싶다는 마음이 들 겁니다.
어렸을 때 제가 그랬습니다.
하루하루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 힘들고 늘 배고프던 때입니다.
그때 저는 배고픈 것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런 제 인생,
이런 인생이 나아질 것 같지 않고 계속 될 것 같은 제 인생이
서럽고 고통스러웠으며 그래서 하느님이 절실하였습니다.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 아니고 이런 인생을 원한 것은 더더욱 아니라면
나를 태어나게 한 존재가 있어야 하고 나를 왜 태어나게 했는지
그 이유를 하느님한테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고통뿐이고 불행하더라도 내세에서라도 행복하다면
이 고통과 불행을 참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죽어도 아쉬울 것 없고,
죽음이 두려울 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편안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자살 흉내를 내면서 당신이 계시다면 죽음을 걸고 찾는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 보이시라고 하느님께 엄포도 놓았습니다.
물론 자살 흉내는 실패로 돌아가고 하느님 체험도 하지 못했지만.
아무튼 저는 하느님이 없고 살 의미가 없다면 빨리 끝내고픈 마음 때문에
살아야 할 의미이신 하느님을 절실하게 찾았고 이런 갈망 덕분에 비록
절망을 거쳤지만 삶의 의미요 희망이신 하느님을 마침내 찾았습니다.
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10여 년을 거쳐
드디어 하느님을 찾은 저의 25살은 참으로 찬란하였고
그때부터 저는 뭘 해도 의미가 있었으며 사는 것이 정말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하느님은 안 계시다면 죽을 우리 인생에게 살아야 할 의미이시고
그래서 하느님은 나의 생명이시며 생명의 빵을 주시는 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있는 생명의 빵이십니다.
그래서 그때 이후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저는 조금씩, 조금씩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체를 조배하고, 더 나아가 성체를 모시는 것이
마치 피를 많이 흘린 환자에게 한 방울 한 방울의 피가 귀하듯
생명을 수혈하는 귀한 성사가 되어야 함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오늘입니다.
정말로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온 마음과 온 몸으로 일어나 온 정성과 감사로 당신을 받아모시고
당신이 함께 가자고 하신 이 길을
묵묵히 기쁘게 가고 싶습니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은 저를
당신께서 친히 살려내시어 새롭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