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같이 상처를 받고 신음하는 사람이 많은 때에,
프란치스코의 오상 축일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의구심이 들면서 오늘은 이런 관점에서 묵상을 해봤습니다.
참으로 요즘은 상처 받았다는 사람이 많고
그래서 여기저기서 Healing/힐링, 치유가 유행어이고,
요즘은 Trauma트라우마라는 말을 그 뜻도 잘 모르면서 유행어처럼 씁니다.
이런 때 프란치스코의 오상 축일을 지냄이 그들의 힐링에 도움이 될까요?
아니면 미친놈의 타령이라고 빈축이나 살까요?
제가 보기에 요즘 많은 사람들은 상처나 트라우마에 전염된 것 같습니다.
남의 트라우마에 내가 전염된 것도 있지만
남이 트라우마 운운하니 나도 있다고 하는 식의 전염입니다.
사실 마음의 상처니 트라우마는 옛날에 더 많이 받았지요.
일제시대를 거쳐 한국전이니 월남전의 전쟁을 겪은 윗세대들은
국가적이든 개인적이든 더 많은 참상과 상처를 경험하였는데도
그것이 모두에게 해당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살기 위해서
그런 상처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인지
그저 기억으로 얘기하지 요즘 사람들처럼 상처타령을 하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의 차이를 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자기연민에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
어린아이가 넘어지면 자기가 벌떡 일어날 수 있는데도
괜히 울며 주위를 쳐다보며 동정해주거나 일으켜주기를 기대합니다.
이에 비해 옛날 사람들은 어쩌다가가 아니라 매일 경험하는 것이 상처고
자기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경험하기에 그 상처를 까짓것 합니다.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면 옛날 사람 같으면 상처 났을 때
상처 났군 하고 끝나거나 기껏해야 빨간약 바르는 것으로 끝나는데
지금 아이들이 넘어지면 병원에 가고, 상처로 남으면 안 된다고 호들갑떱니다.
이번에도 메르스가 왔다고 하니 사회전체가 떠들썩하고,
건강한 젊은이들이 더 앞 다퉈 입마개를 하고 다닙니다.
사실 저항력이나 면역력이 약한 어린이나 노인과 환자들 외에는
메르스가 들어오려고 해도 건강한 몸이 저항을 해 막아냅니다.
그런데 저항력이나 면역력이 어떻게 생기고 어떻게 강하게 됩니까?
부모로부터 건강한 몸도 유전 받아야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적당히
외부 침입자들과 싸우면서 저항력과 면역력이 강해지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적당히>가 관건입니다.
그 나이에 맞는 고통과 어려움을 받아들여서 이겨내야
그 다음 더 큰 고통과 어려움도 싸워 이길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지요.
문제는 받아들이려는 마음자세랄까 정신이 없거나 허약한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고통과 닥친 어려움이 너무 크다고 지레 두려워하거나
나한테만 이런 고통과 어려움이 닥친 것처럼 생각하고,
더 나아가 아무도 나의 아픔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고통과 어려움 앞에서 외로워하고 자기연민에 빠집니다.
우리는 어떻게든지 살아야 하고 건강하게 살아야합니다.
그런데 자기연민이 우리를 살려주지 않고
자기연민이 우리를 강하게 하지 않습니다.
넘어지면 벌떡 일어나는 마음자세와 정신을 가져야 하고
어린애처럼 남이 일으켜주기를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상처를 이기는 힘은 상처를 통해서 생깁니다.
홍역예방 주사나 각종 백신이 다 그런 것 아닙니까?
약한 균을 미리 맞아서 면역력과 저항력을 키우면
더 센 진짜 균이 쳐들어와도 이길 수 있게 하는 거잖습니까?
프란치스코는 나병환자를 나균처럼 싫어했고 두려워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살살 피해 다녔고 도망쳐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외길에서 만났고 그때도 여느 때 같으면 도망칠 것을
그래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먹고 오히려 끌어안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이 극복의 의지와 정신을 가지고 껴안고 나니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고,
두려움에 벌벌 떨던 자기를 극복하고 강해진 자기를 만날 수 있었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그가 나병환자를 껴안을 때 용기를 주십사고 하느님께 기도하였고,
그래서 껴안을 수 있었던 체험을 함으로써 하느님 체험도 강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가 껴안은 나병환자,
그렇게 두려워하던 나병환자가 예수님이라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내가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그것이 예수님이라니!
십자가를 껴안지 않고는 예수님을 껴안을 수 없다는 것을 체험으로 깨달은 것이고,
이때부터 십자가를 두려움 없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가 가까워지자 그 십자가의 고통을 예수님만큼 느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똑같은 고통을 달라고, 고통을 두려워않는 사랑을 똑같이 달라고
십자가 현양 축일에 라베르나 산에서 청하니 오상이 은총으로 주어졌습니다.
나도 주님처럼 상처를 받길 원하지 않으면 상처는 두려움으로 남을 것이요,
나도 주님처럼 상처를 받길 원하면 프란치스코처럼 상처를 사랑하게 됨을
프란치스코에게 배우고 깨닫는 오늘입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부 성 프란치스코의 전구를 청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오늘 오상 축일로부터 성 프란치스코 대축일까지 프란치스칸 축제가 시작됩니다. 이 축제 기간
프란치스코에게 흠뻠 젖는 나날이 되시길 바라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