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코헬렛서를 오랫동안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합니다.
사실 코헬렛서를 잘못 이해하면 신앙적으로 위험한데도
저는 좋아하고 중요한 때 이 말씀들을 떠올립니다.
특히 10대와 20대 때 저의 피가 너무 걸쭉하고 뜨겁게 들끓을 때는,
그때 전도서라고 했는데 이 전도서가 저의 피를 식혀주고 맑게 하였지요.
언젠가는 친구와 등산을 하고 내려오는데 어떤 군인이 술에 엄청 취해
고등학생인 저와 친구를 붙들고선 싸우려고 드는 것이었습니다.
저희가 지팡이 삼아 짚고 내려오던 몽둥이를 내 친구로부터 빼앗아
그것으로 제 친구를 때리려는 순간 제가 제 몽둥이로 선제공격을
하여 얼굴이 찢어졌고 피가 줄줄 흘러내릴 정도로 상처를 입혔지요.
그런데도 저는 아무 죄책감도 없었고 그를 치료해줄 생각도 없었으며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그냥 내려와 버렸는데 그 때도 저는
머리 꼭대기까지 차있는 화기가 빠져나가고 피가 맑아진 듯한 느낌과 함께
까뮈의 <이방인>을 떠올리며 그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을 했으며
오늘 전도서의 구절을 떠올린 적이 있습니다.
정욕이든 성취욕이든 욕망이 강하고 그에 대한 집착이 강할 때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는 말은 강력한 처방전이었으며,
어떤 중요한 일을 앞두고 너무 긴장하거나 조바심할 때도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은 ‘까짓것’할 수 있게 해줬지요.
아무튼 코헬렛서는 저로 하여금 심호흡을 하고 욕망을 대하게 하고,
인생 전체를 전망하면서 현재의 삶과 일들을 보게 함으로써 저는
마음을 가다듬고 삶을 관상하고 삶을 가지런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코헬렛서가 이제는 욕망에 대한 처방전 정도가 아니라
현재 저의 마음을 대신 읽어주고 제 삶을 표현해주는 말씀들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경험한 사람이 젊은이에게 하는 교훈이 아니라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의 나눔 같이 저에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뿐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는
만족케 할 수도 없고 만족을 하지도 못하는 존재인데
이것을 깨닫지 못했을 때는 마치 내가 그럴 수 있는 양
또 누가 그렇게 해 줄 수 있는 존재인양 생각합니다.
그러나 누구를 만족케 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한 사람 만족케 할 수 없고
또 누가 나를 만족케 해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에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만족을 구하지만 다 헛물을 킬뿐이지요.
또 설사 내가 너를 만족케 하고 네가 나를 만족케 하여도
그 만족이 영원하지 않으니 영원 앞에서
우리가 애쓴 것도 헛것이나 마찬가지고 만족도 허무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오늘 코헬렛은 이렇게 한탄하는데 절절하지 않습니까?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가득 차지 않는다.
온갖 말로 애써 말하지만 아무도 다 말하지 못한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전에 피가 펄펄 끓을 때는 이 코헬렛서를 읽으면서
인생 전체를 놓고 현재를 보았다면
이것저것 많은 것을 시도하고 애를 많이 쓴 지금은
영원 앞에서 인생 전체를 보며 허무하다 할 정도로
그 모든 수고와 노력이 보잘것없음을 묵상합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영원 앞의 허무를 느끼는 우리는
하느님 앞의 허무를 느끼는 것임을 깨닫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