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와 복음은 지혜를 얘기합니다.
먼저 독서는 지혜의 효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지혜와 함께 좋은 것이 다 나에게 왔다.
지혜의 손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산이 들려 있었다.”
사랑은 모든 덕의 종합이요 완성입니다.
모든 덕이 모아졌을 때 비로소 참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참고 기다리고’를 시작으로
사랑의 모든 요소를 나열한 것도 바로 사랑의 이러한 면 때문이지요.
사랑이 이러한 것임에도 다시 말해서 모든 덕의 종합이요 완성임에도
지혜가 없으면 사랑은 어리석은 사랑이 되고 맙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은 뭐든지 사주는 것이
진정 아이에게 좋은 건지 부모가 생각지도 않고 사준다거나
아이가 단 것을 좋아하면 이빨이 썩는데도 사탕을 준다거나
고생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갖게 해주는 것과 같은 거지요.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덕들에게 바치는 인사에서 지혜를 여왕이라고 합니다.
“여왕이신 지혜여, 인사드립니다.”
지혜가 우리를 단순하게 하고,
지혜가 우리를 가난하게 하며,
지혜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지혜가 우리를 사랑하게 한다는 뜻이 있는 거지요.
예를 들어 백발의 늙은이를 지혜롭다고 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아주 단순하고 가난한데 이렇게 되기까지 과정이 있습니다.
그도 젊었을 때는 온갖 욕심이 많아 이것저것 다 소유하려 했습니다.
그러다 가족을 잃고 건강까지 잃었으며 그래서 나이 먹어
‘건강이 최고’라고 하며 건강 이외의 것들은 다 포기함으로써
단순하게 살고 가난하게 사는 지혜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혜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잃은 것인데
실은 지혜를 얻음으로써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지혜는 잃기 전에 버리는 지혜이고 그런 다음 얻는 지혜인 것입니다.
지혜는 얻는 지혜라는 것을 우리는 아주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건강을 얻기 위해 우리는 근심걱정을 버리는 것이고,
근심걱정을 않기 위해 이 세상 것들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가 진정 얻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건강입니까?
나이든 사람에게 물으면 백이면 백 다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고 하는데
우리 신앙인도 똑같고, 신앙인이 이 정도에 그쳐도 되겠습니까?
우리 신앙인이 신앙 없는 사람보다 나아야 한다면
건강을 얻는 것이 가장 소중한 것을 얻는 것이어서는 안 되고
오늘 복음의 부자처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어야겠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의 부자가 건강이나 다른 것을 얻으려 하지 않고
영원을 생명을 얻으려했던 것은 분명 지혜로운 거였지만
그 얻는 방식의 선택은 지혜롭지 못했습니다.
앞에서 얘기한, 버리면서 얻는 그 방식을 거부했고,
이 세상 것을 버리면서 하느님 나라를 얻는 것을 거부했으며,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이 세상 재물을 하나도 버리지 않으려고 한 욕심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한 것도 결국 욕심이었고,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진시왕처럼 이 세상에서
지금 가지고 있는 것 하나도 잃지 않고 천년만년 살겠다는 거였습니다.
하여 버리는 지혜 없이 얻는 지혜도 없음을 깊이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어제 밤 해결하지 못하고 아침을 맞은 지금 마음 속에 따져봐야 할 일들을 어떻게 추스릴까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