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이신 하느님을 체험하기를 우리는 갈망한다.
그런데 그 하느님의 본 모습을 뵈옵기가 쉽지 않게 느껴진다.
오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놀라운 신현체험을 하게 된다.
이렇게 좋을 수가...
너무나 황홀하고 좋아서 어쩔줄 모른다.
그냥 여기에 계속 머물고 싶다.
여기에 그냥 묻혀 있고 싶다.
우리도 이와 유사한 경험들을 한 적이 있다.
우리의 영세때, 서약때, 혹은 서품때...
아니면 어느 피정 때 혹은 어떤 말씀의 감동 때,
기도 가운데....
이러저러한 경우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 체험을 한 것이다.
때론 그것이 하느님 체험인지 조차도 모르는 채 말이다.
오늘 그때의 체험들을 다시한번 떠올려 보자.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하느님 체험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또 그 가운데 매일 잠겨있고 싶은 갈망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마치 초막 셋을 짓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고 싶어한
베드로 사도 처럼...
하지만 이것은 욕심이요 유혹이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하느님 체험은 이 지상에서 영원히 누릴 것이 아니고
미래에 우리가 누리게 될 그 하느님 나라를 맛보기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그 하느님 체험은 이 지상에서의 수많은 고통과 어려움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견디어낼 수 있게 만들어준다.
예수님의 수난예고는 그래서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고통없는 영광만을 욕심내고 있기에
주님으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는 소리를
베드로와 함께 듣고 있는지 모른다.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은
이제 그 어떠한 고통도 괴로움도
이겨낼 힘이 있다.
왜냐하면 이미 하느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하느님의 본 모습을 뵈옵기가 쉽지 않게 느껴진다.
오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놀라운 신현체험을 하게 된다.
이렇게 좋을 수가...
너무나 황홀하고 좋아서 어쩔줄 모른다.
그냥 여기에 계속 머물고 싶다.
여기에 그냥 묻혀 있고 싶다.
우리도 이와 유사한 경험들을 한 적이 있다.
우리의 영세때, 서약때, 혹은 서품때...
아니면 어느 피정 때 혹은 어떤 말씀의 감동 때,
기도 가운데....
이러저러한 경우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 체험을 한 것이다.
때론 그것이 하느님 체험인지 조차도 모르는 채 말이다.
오늘 그때의 체험들을 다시한번 떠올려 보자.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하느님 체험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또 그 가운데 매일 잠겨있고 싶은 갈망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마치 초막 셋을 짓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고 싶어한
베드로 사도 처럼...
하지만 이것은 욕심이요 유혹이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하느님 체험은 이 지상에서 영원히 누릴 것이 아니고
미래에 우리가 누리게 될 그 하느님 나라를 맛보기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그 하느님 체험은 이 지상에서의 수많은 고통과 어려움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견디어낼 수 있게 만들어준다.
예수님의 수난예고는 그래서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고통없는 영광만을 욕심내고 있기에
주님으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는 소리를
베드로와 함께 듣고 있는지 모른다.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은
이제 그 어떠한 고통도 괴로움도
이겨낼 힘이 있다.
왜냐하면 이미 하느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는 아직 맛을 모르고 살아요..
강론글로 상세하게 설명해주시면 좋겠어요~
凡人 은 고통, 괴로움을 피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이신데.....
나는, 주님을 굳 세게 믿는다고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