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해골이 있는 정물화 (1908)
작 가 :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 : 1881-1973)
크 기 : 89 × 116.3 cm(Oil on canvas)
소재지 : 러시아 성 페테르부르크 에레미타쥬 미술관
구약 지혜 문학에 속하는 작품인 코헬렛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되고 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 다!”(코헬 1:2)
여기에 허무라고 표현되는 바니타스(Vanitas)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로 인생무상, 허무를 뜻하는데 이것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유럽에 페스트가 퍼지면서 14세기부터 등장하게 되었다.
당시 페스트의 병원이 밝혀지지 않는 상태에서 페스트가 발생하면서 유럽 인구의 1/3의 목숨을 앗아가는 무서운 병이었기에, 이런 참담한 현실에서 영글어진 것이 바로 바니타스라는 인생의 허무감을 일깨우는 것이었으며, 이 참상을 두고 신앙적인 사색을 도우기 위해 바니타스(Vanitas)라는 형태의 예술이 탄생했다.
이것이 1550년 경 부터 네덜란드에서 독자적인 형태의 예술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종교개혁으로 칼빈주의 개신교로 변한 화란 사회의 실질적 요청에 의해 이 작품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당시 칼빈주의 개신교는 화란에서 신의 예정설이라는 특별한 교리 체제로 무역과 식민지로서 새로운 부를 축적한 개신교 사회에 복음적 성격을 유지할 수 있는 특별한 처방을 만들었다.
이것은 인간의 구원은 각자의 노력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은총의 소치이기에, 이 세상에서 구원받았다는 확신은 사업에 성공해서 물질적인 성공을 이루는 것이라 가르치면서 긍정적인 차원에서 재산 소유와 근면 생활에 대한 강조가 되었다.
이 결과로 화란은 무역에 많은 노력을 하고 식민지를 개척해서 많은 돈을 벌었으나, 돈이 많아지면서 개신교도들이 하느님을 떠나게 되었기에 이 자가당착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에서의 영화나 물질적인 번영의 허상의 얼굴을 제시해야 했다.
또 이것이 정물화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은 “정물(Still life)”이라는 자체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뜻하니 이것은 죽음을 상징한다는 뜻으로 정물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기본 요소는 예술과 학문을 상징하는 물건, 서적, 악기, 지도 등과 함께 재물을 상징하는 지갑 보석을 위시해서 세속적 쾌락을 상징하는 고급 술잔, 파이프, 카드 등과 함께 필수로 등장하는 것이 삶의 덧없음의 상징인 해골이었다.
17세기 네덜란드가 부유해지면서 이런 작품은 웬만큼 사는 가정의 필수적인 장식품이 되어 물질적 유혹에 빠지지 않고 삶의 균형을 찾게 해주는 필수품이 되었다.
한마디로 성상이나 성화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지닌 개신교도들에게 성화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네덜란드 개신교도들은 이 작품을 보면서 코헬렛의 저자가 말하는 진실, 즉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를 새기며 묵상하게 되었다.
피카소는 가톨릭 신자로 태어났으나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신앙을 떠나게 되었다. 신앙을 떠났다는 것이 결코 하느님을 떠났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가르치는 하느님, 하느님을 가르치는 교회의 경직되고 폐쇄적이며 권위적인 모습에 실망해서였다.
그가 본 가톨릭 교회는 복음적인 가치의 실현 보다는 외형적 조직 유지와 확장에 더 신경을 쓰며 가진 사람들의 보호막이 되어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외면하는 모습으로 다가왔기에 그는 철이 들면서 헌 신발을 벗어던지듯 미련 없이 교회를 떠났다.
이렇게 피카소는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받은 가톨릭에서 이탈했고 일생 동안 교회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삶을 살면서, 어떤 제도적 종교의 바탕도 거부했으나 그는 일생 동안 자기 나름대로 전체는 아니지만 하느님 나라에 대한 그리움을 지니고 살면서 이것이 파괴되는 것을 보면 강한 저항의 몸짓을 작품으로 표현했다.
약한 자에 대한 배려나 불의에 대한 분노는 그의 일생을 지배하는 정서였으며 교회가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독재자나 잘못된 정치 체제 앞에 교회가 침묵하는 순간에도 그는 불같은 분노의 표현으로 예수의 제자로서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제도적 교회가 강조하는 조직 유지를 중요시하는 것 보다 양심의 목소리를 듣고 표현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의 삶은 제도적인 교회의 가르침과는 무관한 자유분방한 삶이 었다. 스페인에서 자질을 인정받은 그가 예술의 도시인 파리에 와서 적응하고 능력을 인정받기까지 뼈저린 가난과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과 같은 슬픔을 대면하면서 청색 시대 작품을 제작했으나, 1907년 그의 초기 걸작 〈아비뇽의 여인들〉을 발표되면서 그의 명성이 알려지자 부와 여성이 함께 몰리게 되어 그의 생활은 참으로 분방해졌다.
그의 공적인 여성 편력은 8명의 여성과 결혼하게 되었으며 72의 나이에 27세의 여인과 결혼하고, 40세에 첫 아들을 얻을 만큼 그의 삶은 더 없이 분방하게 살았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공산당원으로 활동했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파리에서 독일 나치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로 활동했고, 더욱이 우리나라에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아무 면식도 없는 우리의 전쟁에 대해서도 크게 분노하면서, 전쟁의 참상을 그린 〈한국의 학살〉, 〈전쟁과 평화〉 등을 발표하면서 강대국들이 한국이라는 약소국가를 전쟁터로 만들어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고발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그가 파리에 정착해서 화가로서 두각을 드러내기 전 까지 겪어야 했던 가난과 실망의 청색 시대를 끝내고,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애인도 생기고 물질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장미 시대가 시작된 시기의 작품이다.
야망을 기대 이상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사회적 신분 상승과 경제적 성장,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것 같은 행복의 무지개를 바라보는 희망에 도취될 순간에 이 작품에 신경을 돌리게 된 것은 그가 현세적 안락에 안주하며 관능의 흐름대로 살아가는 젊은이가 아닌 교회의 가르침과는 다르지만 인생의 참 모습의 발견을 갈망하던 정직성을 지녔던 인간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바니타스와 전혀 다른 입체파적인 표현을 사용했고 먼저 해골은 바니타스 그림에 필수로 등장하는 것이며 인생의 유한성과 허망함의 상징이다.
그가 이 작품을 제작할 시기는 그의 화가로서 성공의 본격적인 괘도에 오른 장미시기의 작품이었기에 전체를 붉은 색으로 하면서 화려한 빛으로 장식된 축제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작가는 윗부분에 자신의 예술을 상징하는 팔레트와 붓 캔버스를 통해 자신이 혼신을 다해 몰두하고 있는 예술에의 실상을 제시하고 있다.
작가는 이때 성공 가도의 궤도에 올라 승승장구 하던 젊은이였는데, 야심만만한 자신의 미래의 정확한 모습을 이 작품을 통해 제시한다는 것은 자기 성찰에 몰두하는 수도자의 숭엄한 모습처럼 경건하게 보인다.
아랫부분에 있는 책 더미는 문화와 교양을 상징하며 상류사회에 진입한 사람들에겐 신분 상승의 상징으로 제시되는 것이며 그 위에 던져진 파이프는 독서를 하면서 느긋한 즐거움에 빠질 수 있는 고급 권연을 즐길 수 있는 도구이다.
이 작품의 성격은 과거와 달리 형식적으로 입체파의 기법을 사용한 것 외에는 전통적인 기법과 별 차이가 없으나 작가가 이 작품을 제작했던 시기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인생 말기의 작품이나 산전수전 겪은 후 뼈아픈 실패 체험 속에서 이루어진 작품이 아니라 나이와 경력으로 봐서 인생의 승승장구하던 시기의 작품이라는 것이 많은 생각의 계기를 주고 있다.
코헬렛의 격언은 역사의 과정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사색에 의해 더 새로우면서도 인생의 진실에 눈뜨게 만드는 여러 격언들을 만들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다음의 격언이다
“그대도 언젠가 죽어야 할 인간임을 기억하라!”(Memento te hominem esse!)
작가는 바로 찬란한 젊음과 성공에 도취될 수 있는 시기에 이 말씀이 마음에 깊은 충격으로 다가 온 젊은이의 인생 고백을 남기는 마음으로 이 작품을 제작했다고 볼 수 있다.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Respice post te, homimem te esse memento.” (그대 과거를 한번 돌이켜 보고 그대 역시 죽을 인간임을 명심하라.)
피카소를 빼놓고는 현대 미술을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그는 20세기 미술사에 큰 영향을 미쳤기에, 누가 뭐래도 그는 20세기 최고의 작가라 인정하는데 아무도 부정할 사람은 없지만 이 작품은 제도적인 교회를 떠난 작가가 고집했던 새로운 인생관을 제시하고 있다.
작가의 분방한 삶은 제도적 교회가 강조하는 지옥 벌과 같은 공포에서 해방된 모습이었다. 작가는 제도적인 교회가 신자들이 죄에 빠지지 않고 교회를 이탈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심어 주었던 공포감에 대한 새로운 처방을 이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인간에게서는 살아있는 동안 즐기며 행복을 마련하는 것 밖에는 좋은 것이 없음을 나는 알았다. 모든 인간이 자기의 온갖 노고로 먹고 마시며 행복을 누리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다“ (코헬 3:13 -14)
오늘 많은 사람들이 로마의 철학자였던 호라티우스(Horatius : BC 65–8)의 격언인 다음 말을 자주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Carpe diem(인생을 즐겨라)”
이 말속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으나, 이 작품 속에 이 모든 것을 통합할 수 있는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
작가는 제도적 교회를 떠나 분방한 삶을 살면서도 그의 인생은 정직하고 사유하는 삶이었으며 이 작품은 작가의 이런 인생에서 영글은 자신의 인생철학이 집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과거 교회는 인간이 유혹에 빠져 죄에 떨어지는 것을 지나치게 염려해서 죄의 벌과 지옥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Vanitas를 일방적으로 강조하게 되었으나, 이것은 선량한 유아 교육의 형태이고, 성서 전체를 보면 코헬렛의 작가처럼 인생을 즐기라는 권고도 있으니, 크리스챤적인 인생은 절제와 향유라는 두 개의 기둥으로 지을 때 가장 균형 있고 안정될 수 있다.
작가는 제도적인 교회 차원에선 분방한 삶을 살았으나 인생에서 하느님 안에 즐기는 지혜를 실천했기에 우리들에게 좋은 교훈을 남긴 작가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