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서간에서 바오로 사도는 ‘답게’라는 말을 두 번이나 사용합니다.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도 그리스도처럼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그런데 둘 다 자녀답게 살라는 것인데
하나는 ‘사랑받는 자녀답게’이고 다른 하나는 ‘빛의 자녀답게’입니다.
제 생각에 ‘답게 살라’는 말은 정체성에 맞게 살라는 것인데
그렇게 사는 것이 보통 쉽지 않고 벅찹니다.
왜냐하면 모든 ‘답게’가 보통 더 고귀한 정체성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짐승답게 살라고 하지 않고 오늘 서간처럼
하느님의 자녀나 그리스도인답게 살라는 것이고
적어도 사람답게 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우리는 사람답게 사는 것도 쉽지 않고 벅찬데
더 고귀한 정체성을 살라는 것이고,
더 고귀高貴하다는 것은 더 높고, 더 귀한 것이기에 벅찰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 우리는 이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답게 사는 것도 벅차니 더 고귀한 정체성은 포기하던지,
벅차기는 하지만 기회가 주어졌으니 한 번 살아볼 것인지.
이는 마치 이와 같은 것이지요.
지금까지 종으로 살아왔는데 종으로 너무도 충직하게 살았다고
주인이 면천을 해줘 양반이 될 수 있지만 평생 종으로 산 사람이
양반으로 사는 것이 힘드니 면천하여 양반되기를 포기할 것인지,
아니면 힘들어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인지 선택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우리는 고귀한 정체성을 선택할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데 어쩌렵니까? 고귀한 정체성을 선택한다면
이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그것은 이렇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다우려면 하느님처럼 사랑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것은 ‘용서하는 것’과 ‘향기로운 제물로 자기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지금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데
사랑받는 자녀다우려면 그를 용서해야 하지만 그럴 수 없어서
용서하기를 포기한다면 고귀한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내가 지금까지 용서치 못했다면 쉽지 않아서인데
쉽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나의 사랑으로 용서하려고 했기 때문이기에
이제는 전과 달리 하느님의 자녀답게 하느님 사랑을 받아 용서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면 성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을 넘긴 죄인들을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당신을 제물로 바치신 것처럼
향기로운 희생제물이 되어야 압니다.
그런데 죄인들을 용서하는 것도 힘든데 그 죄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라니.
다음은 빛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어둠의 행실, 곧
어둠 속에서나 하는 짓들은 그만 두고 빛 안에서 머물며, 빛의 갑옷을 입고
빛 안에서 하는 정상적인 행위들만 하는 것입니다.(로마3,12)
그런데 우리는 빛의 자녀라는 것이 종종 싫고 심지어 두렵기까지 합니다.
빛으로 나아가면 나의 모든 것이 드러나기 때문인데
누가 봐도 칭찬받을 짓을 내가 한다면 두려울 것이 없고 오히려 보란 듯
할 텐데 드러나면 안 될 짓을 하려고 하기에 어둠 속에 있으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역시 선택해야 합니다.
빛으로 나아가 빛 가운데 있을 것인가, 어둠 속에 있을 것인가?
아무튼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불륜이나 온갖 더러움이나 탐욕은 입에 올리는 일”은 없어야 하고
“추잡한 말이나 어리석은 말이나 상스러운 농담”은 하지 말라고.
있음인데 자녀답게 프란치스칸 답게 머리에서, 가슴으로, 손발로 내려오기 까지가 너무 더뎌서 ..저 자신도 답답합니다.